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 [기자말] |
누정(樓亭)은 백성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 올라 경치를 즐겨 구경할 여건을 갖춘 권력가의 전유물이자 권위적인 건축물이다. 본디 권위적인 건축은, 권력을 쥔 지배자나 거대 자본의 논리에 복무하는 속성이 있다. 이는 체제나 이데올로그와 무관하며,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물며 별서(別墅)에 딸린 누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런 선입견으로 석파정(石坡亭)에 남게 된 전혀 다른 얼굴의 정자를 찾는다.
원림인가? 밀실인가?
조선 초기 한양에 위치한 원림(園林)은 4대문 밖에 있었다. 주로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압구정이나 효사정이 대표적이다. 조선 후기, 한강은 발달된 상업의 영향으로 물류중심을 이루며 곳곳에 포구가 번성한다. 왁자지껄 장시(場市)가 확장되면서, 유유자적 풍경을 감상할 공간이 아닌 곳으로 변모한다.
이때부터 원림은 도성 근처에 자리하려는 경향성을 띤다.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 별서 옥호정(玉壺亭)이 대표적이다. 각 파당의 이익을 위해 가급적 궁궐 가까운 곳에 위치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밀담을 나누거나 파당 회합을 도모하는 목적이 컸던 것으로 추정한다. 어쩌면 석파정도 이 같은 기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석파정은 내사산(內四山) 중 북악, 인왕산 사이 계곡에 자리한다. 인왕산 자락 북동쪽이다. 궁궐이 지척이다. 북소문(北小門)인 창의문(彰義門)을 지나면 곧바로 도성이다. 석파정 능선 위로 올라가면, '몽유도원도' 실경으로 추정되는 북한산 보현봉이 지척에 보이는 안평대군의 무계정사(武溪精舍)터가 있다. 주변이 그만큼 선경(仙境)이라는 방증이다.
석파정을 누가 언제 조성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바위에 새겨진 '물속에 깃들어 구름을 발(簾)로 삼는다'는 소수운렴암(巢水雲簾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21년 권상하(權尙夏)가 친구 조정만(趙正萬)에게 새겨준 글이다. 조정만 별서다. 그가 죽고 세도정치 시기 안동김씨가 차지한 것으로 추정한다. 세도가 김흥근(金興根)이 소유한다. 그는 '세 개의 작은 개울이 한군데로 모여 흐르는 곳'이라는 데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이름 한다.
석파정, 대원군 손에 넘어와 바뀐 이름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김조순(金祖淳)이 연다. 그의 고조할아버지가 김상헌(金尙憲)이고, 할아버지가 김수항(金壽恒)이다. 김수항은 소위 6창(昌)이라 부르는 여섯 아들을 두었다.
6창의 자손들이 안동김씨 핵심 세도가를 형성한다. 헌종 장인 김좌근(金左根)과 철종 장인 김문근(金汶根)이 대표적이다. 이 둘의 시대는 철종의 죽음과 함께 힘을 잃는다. 삼계동정사 주인 김흥근도 못지않은 세도가다.
철종이 병들자, 흥근의 큰형 김홍근(金弘根)이 만만해 뵈는 흥선을 왕으로 추천한다. 안동김씨들이 펄쩍뛴다. 김좌근 집에서 비렁뱅이 노릇하던 파락호에, 적지 않은 나이도 반대명분이다. 풍양조씨가 나선다. 효명세자 빈(嬪)이자 헌종 어머니 신정왕후다. 흥선 아들 익성군을 양자로 들여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김좌근과 김흥근이 비밀회동을 한다. "만일 흥선이 대원군임을 앞세워 국정에 간섭하고 그 위세로 나라를 좌지우지하려 들면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어떤 명분으로도 그 일만은 막아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흥선이 깊은 앙심을 품는다.
흥선이 흥정에 나선다. 아들이 왕이 되면, 친분이 두터운 김병학(金炳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일 것을 약속한다. 안동김씨는 권력기반이 이어질 거라 믿어 안심하게 된다. 고종이 등극하자, 흥선은 약속을 어기고 민씨를 왕비로 들여앉힌다.
그리고 어린 왕을 대신해 정치에 관여한다. 나랏일이 흥선 손아귀에 모아진다. 이에 김흥근이 나서, 조의(朝議) 석상에서 공공연하게 흥선을 비판한다. "대원군을 사가로 돌려보내 정치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권력이 손아귀에 들어오자, 흥선은 세도정치를 끝장내려 한다. 비변사를 혁파하고 김좌근을 영의정에서 끌어 내린다. 그의 아들 김병기도 좌천시킨다. 특히 앙심이 컸던 김흥근의 물적 기반을 무너뜨린다. 땅은 물론이고 삼계동정사마저 빼앗아 버린다. 황현의 <매천야록>이 이를 기술한다.
흥선은 장동 김씨 중에서도 흥근을 가장 미워해 그가 소유한 땅(田莊) 수십 경(頃)을 빼앗는다. 흥근이 북문 밖 삼계동(三溪洞)에 별업(別業)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다. 흥선은 그 별업을 팔 것을 청한바 있으나 흥근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에 흥선이 하루 만이라도 놀이에 빌려줄 것을 재청한다. 대개 원정(園亭)을 소유한 자는, 다른 사람이 놀기 위해 빌려 달라 청하면 부득이 빌려주는 것이 예로부터의 습속이다. 흥근이 강권에 못 이겨 이를 허락하는데, 흥선은 아들인 임금에게 권하여 그곳을 함께 다녀온다. 그 후 흥근은 임금의 발길이 머문 곳을 감히 신하된 도리로 거처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겨 다시는 삼계동 별업을 찾지 않게 되어, 결국 운현궁 소유가 되었다.
흥선은 빼앗은 삼계동정사를 '석파정(石坡亭)'이라 고쳐 부른다. 북악·인왕·북한 세 산이 모두 바위가 노출되어 있어 그리 붙인 것이다. 산수화를 그리는 석파법(산등성이에 있는 돌출된 암벽이나 바위를 그릴 때 사용하는 기법)에서 따온 이름으로, 곧 흥선의 호이기도 하다. 석파는 '바위(石)언덕(坡)'이란 의미고 여기에 정자(亭)를 합한 것이다.
정자는 이제 터만 남은 '육릉모정(六陵茅亭)'을 지칭한다. 석파정에 들어서면 왼편 개울 건너 바위언덕에, 육각의 정자 터가 있다. 육릉모정이 있던 곳이다. 기다랗게 깎은 돌이 육각형 모양으로 박혀있고, 주변은 검은 박석이 깔려있다. 지붕을 풀이나 띠로 이었던 소박한 정자로 추정한다.
석파정에 남게 된 전혀 다른 얼굴의 정자
조정만이 소수운렴암으로 경영할 때는 단출한 건축물배치다. 그가 죽고 난 후 1753년 권신응이 그린 〈삼계동〉을 보면 사랑채로 추정되는 건물이 전부다. 김흥근이 소유하면서부터 석파랑과 안채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생겨난다. 1860년 전후 이한철이 그린 〈석파정도〉 8폭 병풍은 많은 건축물이 앉아있는 석파정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마당엔 네모난 연못이 있고 들어서는 입구에 문간채도 있다. 이후 흥선에게 와선 별원이 예닐곱 채로 커진 것으로 보인다. 집들은 각각 안태각(安泰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등의 이름을 갖는다. 이 중 4채만이 옛 자리에 남아있다.
남은 건물배치는 비교적 단조롭다. 서쪽 사랑채 'ㄱ'자 한옥 현대루(玄對樓)가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왼쪽 끝엔 누마루 1칸이 돌출되어 있다. 옆으로 'ㅁ'자 안채가 앉아있다. 안마당에서 보면 동서 5칸, 남북 4칸으로 제법 규모 있는 집이다. 안채 뒤편으론 고종이 종종 머물렀다는, 멋들어진 화계(花階)를 둔 'ㅡ'자형 별채가 있다.
이런 배치 가운데 특이한 정자 하나가 있다. 사랑마당을 지나면 계류(溪流)가 머무르는 작은 연못이 나온다. 이 연못에 잇닿아 또 다른 연못으로 물길이 이어진다. 그 위에 작은 정자가 자리한다. 석파정 서쪽 깊은 골짜기로 한참을 지나야 하는 곳이다.
근대의 시작인가? 작은 골짜기에 앉은 정자가 이국적이다. 우리 얼굴이 아니다. 계곡 사이 돌로 무지개 틀을 세워 기단으로 삼았다. 그 위에 사방으로 트인 작은 정자를 앉혔다. 작은 난간을 두었을 뿐, 어떤 장식도 하지 않았다. 바닥은 돌이고, 지붕은 거무스름한 동판이다. 최고 권력자들이 향유한 공간이다.
그 공간에 중국식 건축물이 버젓하다. 유럽을 모방한 청나라 양식을, 큰 거부 반응 없이 받아들인 흔적이다. 김흥근이 청나라 기술자를 초빙해 지었다하나,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정자로 드는 곳은 돌다리다. 널돌다리 모양이나, 깎인 돌이 좁고 날카롭다. 절선형(折線形) 중국식 다리다.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라는 제법 긴 이름을 가진 정자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화사한 단풍을 구경하는 정자'라니, 이름만으로도 정신이 어질하다. 사방에 눈이 부신 고운 단풍이 지천이다. 작은 여울엔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사위는 온통 붉고 노란, 색의 향연이다. 가을이 농익어가는 소리요, 색이다. 화려함으로 물든 별천지다. 위쪽 바위계곡에서는 크진 않으나 작은 폭포소리가 들려온다. 위아래로 바라다 보이는 풍광이 하도 신비로워, 넋을 쏙 빼내가 버린다.
하지만 정자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데 제격으로 보인다. 나라의 모든 권세를 오로지 하고 있는 주인에게 오죽 객이 많았겠는가? 정자는 두 세람이 들어서기에 적당한 크기다. 배행 꾼이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좁고 긴 연못 안에 정자가 서있고, 다리는 좁다. 마당에서 한참 떨어진 거리다. 열린 곳이 아닌 은밀하게 닫힌 공간이다.
근대건축의 시작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이 공간을, 흥선은 어찌 바라봤을까? 근대의 거칠고 드센 물결을 예감했을까? 이 공간에서 누구와 은밀한 밀담을 나눴을까? 그 밀담이 조선을 자주적으로 지켜내는 힘을 기르고, 우리 손으로 만들어가는 근대에 관한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