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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겪으면서 살던 대로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걸 직감 했습니다. 지구가 망하지 않도록, 건강한 지구에 살고 싶어 생활 양식을 바꾸려 노력 중입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소비 패턴의 변화를 연재합니다.[기자말]
 건조기 생각이 절실해지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건조기 생각이 절실해지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 pixabay
 
'작년 장마철에 건조기를 샀어야 하는데... 아니야 지금 집도 좁아. 물건 줄이기로 했잖아...'

나는 몇 년째 이러고 있다. 무한 생성되는 미로를 헤매듯 빨래 건조기를 살까 말까 고민 중이다. 10년째에 접어든 통돌이 세탁기는 가끔 탈수를 못 한다. 경증 건망증에 걸린 것처럼 한 번씩 오작동을 일으킨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를 도로 집어넣고 탈수 버튼을 누를 때면 건조기 구매의 충동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어리석은 짓인 줄 알면서도 이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건 두 조건이 상충되기 때문이다. 편리함과 환경. 태극기의 푸른색과 붉은색처럼 두 조건은 우리 가족의 세계에 공존하며 결코 하나를 지워낼 수 없다. 

조건 하나, 노동량을 줄이고 싶은 육아 부부. 나는 집에서 빨래와 건조, 수납 담당이다. 대학생 무렵부터 자취를 해 왔기에 선뜻 빨래를 맡겠다고 나섰는데 오판이었다. 지금 우리 집은 4인 가구이며 4인 가구가 생산하는 빨랫감과 정리 노동의 양은 상당하다. 하루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아주 고강도 노동은 아니나 품과 시간이 든다. 강도는 높지만 빈도가 낮은 화장실 청소와는 성질이 다르다. 

매번 시간 맞춰 세탁기를 가동하고, 수동 건조대에 널고, 마른 옷감을 개키는 일은 때때로 버겁다. 더구나 나는 빨래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설거지를 비롯한 식사 뒤처리와 방 닦기, 크고 작은 아이들 돌봄까지 일일이 열거하자면 쪼잔해지는 가사노동이 언제나 쌓여있다. 아내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늘 시간에 허덕이고, 커피 없이는 저녁까지 활력을 유지하기 힘들다. 이럴 때 찾아드는 생각. 돈이 행복을 보장해줄 수는 없지만, 시간은 벌어다 줄 수 있다. 시간은 금덩이만큼 소중하다.

건조기의 유혹이 심한 이유 중 하나는 날씨 변수에 있다. 빨래 건조는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 2020년처럼 한 달 넘게 장마가 이어지면 뽀송뽀송한 자연 건조를 기대하기 힘들다. 안 그래도 지친 상태로 퇴근하는데 집에 와서까지 빨래와 씨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다. 경제적으로 걱정 없는 상태를 지향한다. 돈을 두 배로 벌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여유를 누리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사 노동은 항시 존재한다.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인생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위하여 맞벌이를 하는데, 맞벌이로 인해 가사 노동이 버거워진다. 

피곤한 날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내게서 빠져나가는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인생을 낭비하는 듯한 감각마저 든다. 이런 감정은 가전을 풀 세트로 갖춘 지인 집을 방문하거나 SNS를 할 때 더욱 격해진다.

한 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내에게 건조기를 사자고 말했다. 그러나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적지 않은 부담을 지고 있는 아내는 왜 거절했을까. 보통은 내친김에 식기세척기까지 사자며 환영할 만한 제안인데.

아내의 입장은 명료하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나가려면 일정량의 육체 노동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본다. 노동을 부정하고 거부할수록 우리는 기계나 외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 시간이 갈수록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고 외부 위탁 비용이 증가한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럼 우리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고, 한 번 정착된 의존 성향은 개선되지 않는다. 편리함의 역설이다. 듣다 보면 묘하게 설득되어 어느새 방바닥을 닦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건조기를 사고 싶을 때마다 쓰레기를 떠올린다 
 
 수동 건조대에서 비닐봉지 말리기. 건조대는 이사 가는 지인에게서 받았다.
수동 건조대에서 비닐봉지 말리기. 건조대는 이사 가는 지인에게서 받았다. ⓒ 이준수
 
조건 둘, 깨끗한 지구 환경을 후세대에 물려주고 싶은 산책 마니아. 우리는 잘 걷는다. 특히나 풍경 좋은 곳에서 느긋하게 두 발 옮기는 시간을 사랑한다. 단단한 대지를 박차며 걷는 순간은 우리 가족에게 큰 의미가 있다. 지금, 현재 살아있다는 감각이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온다. 

풍광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있다. 훼손되지 않은 모래 사장과 숲, 호숫가는 더없이 아름답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듯하다. 함께 걷는 사람의 얼굴도 환하다. 깨끗하고 맑은 공기는 누구에게나 기쁨을 주고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안타깝게도 풍요로운 자연은 드물다. 청정 지역은 애써 찾아가야 할 정도로 귀하고, 쓰레기는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최근에는 산책로에서도 쓰레기를 목격했다. 지저분한 쓰레기를 보면 들뜬 기분이 확 가라앉는다. 나는 산책갈 때 가끔 쓰레기를 봉투에 담아온다. 쓰레기로 인상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쓰레기는 어디에나 있다. 페트병, 비닐 봉투를 비롯해 녹슨 자전거도 강둑 어귀에 쓰러져 있다. 풀숲에 처박힌 구형 모니터처럼 도무지 물건과 장소 사이의 연결 고리를 짐작하기 힘든 조합도 등장한다. 

나는 빨래 건조기와 식기세척기를 사고 싶어질 때마다 산책길에 주워 온 쓰레기를 떠올린다. 내가 무엇을 사면 언젠가는 쓰레기가 된다. 태어나면 죽는다와 같은 이치처럼 자명하다. 나는 앞으로 쓰레기를 만들지 않겠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과도한 배출자는 되고 싶지 않다. 이것이 나의 딜레마다.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며 장마철마다 불만을 토로하지만, 건조기와 식기 세척기가 생활 필수품은 아니다. 지구적 차원으로 시야를 넓히면 인류의 극소수만이 가정용 빨래 건조기를 사용한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사치품으로 분류해도 될 것이다.

'신혼 부부 3대 필수 가전' 같은 광고 멘트에 익숙한 한국 사람으로서는 의아할 수 있다. 건조기 한 대 얼마 한다고... 그러나 대한민국 중산층 라이프 스타일은 지구적 차원에서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 

힘들다, 그래도 지구는 지키고 싶다 
 
 우리집 전기 사용량은 1년 내내 동일 면적 평균보다 낮게 나온다. 통계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집 전기 사용량은 1년 내내 동일 면적 평균보다 낮게 나온다. 통계로 확인할 수 있다. ⓒ 이준수
 
편리함과 환경보호는 동시에 추구하기 어려운 가치다. 어쨌든 우리 가족은 9년 넘게 건조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는 환경 쪽으로 균형추가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덕분에 전력과 가전제품 구입비를 많이 아꼈다.

우리 집은 가전 제품 구입의 두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 삶의 질을 비약적으로 향상 시키거나 완전히 새로운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 한 신규 구매 하지 않는다. 둘, 동일 기능이라면 기존의 물건이 망가져야 새 물건으로 대체한다. 고칠 수 있으면 고친다. 가전 제품을 적게 사면 실내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생긴다.  

월 평균 전기 사용량도 평균보다 낮다. 아파트 관리비 조회 사이트에서 확인 결과, 지난 1년간 평균을 초과한 경우가 없었다. 대체로 동일 면적의 다른 가정보다 20%에서 30%가량 전기 사용량이 낮다. 텔레비전이 없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집에 거주하는 시간이 긴 가정 치고는 전기를 적게 사용한다. 가정 내 전구를 LED로 모두 교체하고, 대기전력을 차단하는 습관이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곧 장마철이 닥칠텐데 벌써부터 건조기를 사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든다. 하지만 이번에도 잘 버텨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건조기를 사는 게 두렵다. 심리적 장벽이 무너져 버릴까봐 그렇다. 이번 글에서 건조기만 언급해서 그렇지 가전 매장에는 가사 도우미 역할을 하는 수많은 제품이 소비자를 유혹한다. 스타일러, 로봇 청소기, 식기 세척기... 찾아보면 한정 없다. 

만일 어떤 사정으로 혹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건조기를 들여놓게 되면 다른 가전 제품도 줄줄이 따라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봇물이 터진 것처럼. 그럼 지금껏 약간의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온 검약하고 소탈한 삶의 양식이 무너진다.

건전한 균형감각을 잃고 지난날 추구해온 환경적 가치들을 부정해야 하는 혹은 변명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모든 고민이 우스워 보일 수 있다. 정당하게 돈 벌어서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기계 몇 대 사는 게 뭐가 그리 심각한가. 

아, 쉬고 싶다. 기계가 도와주면 좋겠다. 맞벌이는 힘들다. 지구도 지키고 싶다. 쓰레기에 반대한다. 자연은 소중하다... 어쩌면 나는 분열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욕심이 많아서 이것도 잘하고 싶고, 저것도 잘하고 싶다.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 나이를 먹고 세상을 뜨겠지만 '그래도 쓰레기 하나 덜 만들었다' 하고 자기 위로 거리는 하나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지구를구하는가계부#건조기#환경#전기#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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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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