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택근무하는 프리랜서다. 대선후보 구호 중에 지금까지 가장 역대급은 아마 "저녁이 있는 삶"일 것이다. 내 단언컨대 그만큼 섹시한 구호는 앞으로 얼마간은 안 나오지 싶다. 나의 저녁을 되찾아줄 후보였다. 공약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내 처지와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으니까.
잠에서 깨지 않은 몸뚱이를 억지로 일으켜야 했다. 출근하기 위해서는 머리와 얼굴과 몸뚱이가 각각 반수면상태에서 국지전을 치러야 했다. 욕실에서 화장대 앞에서 옷장 앞에서 말이다. 직장인의 조건이라 할 만한 것들과 싸워 이겨야 출근에 성공할 수 있었다. 늘 찌뿌둥했고 야근 후 곯아떨어지기 바빴다.
대선이나 정치라는 것이 우산 같은 거라 그 절대적 영향에서 벗어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에게는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 책임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 후보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퇴사를 했다. 퇴사는 종전선언인 것이다.
퇴사 후 찾은 저녁도, 아침도 있는 삶
저녁뿐 아니라 아침 시간까지 생겼다. 일타 쌍피다. 출근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던 아침이 출근 빼고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 이불속이 얼마나 꿀맛인지 다 알지 않나. 알람은 울리지만 바로 일어나지 않고 고양이들과 스킨십을 한껏 즐긴다. 나의 음악은 거실로 출근하는 길을 숲으로도 오페라 공연장으로도 변신시킨다.
커피콩을 꺼내 그라인더에 붓는다. 급하게 돌릴 때는 '봑봑' 내가 콩을 윽박지르는 소리가 나지만 천천히 돌리면 '샤갈 샤갈' 귀여운 소리가 난다. 식빵에 버터를 바르는 행위마저 우아할 수가 있다. 거실을 커피 향과 버터 향으로 가득 채우고 나서 컴퓨터 앞에 앉으면 고양이가 뛰어올라 키보드 위에 넙죽 드러누운다. 이것이 나의 출근 완료다.
제일 좋은 건 나의 반려묘들과 함께라는 것이다. 책상 위에 고양이가 주렁주렁 풍년이다. 출근만 하면 눈에 밟히던 고양이들을 눈앞에서 만져가면서 일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환장하게 좋은 거다.
기계식 키보드의 스프링 감각을 좋아하는 건지 내 일을 방해하려는 건지 아무튼 우리 고양이 '나뷔'는 내가 자판에 손을 올리자마자 자판 위를 걸어 다닌다. 모니터에는 아직 인류가 미처 해독 못한 '나뷔어'가 기록되고 있다. 충분히 쓰다듬어 주면 고양이는 만족한 얼굴로 자판 연습을 마치고 이제는 ESC 키를 베고 눕는다. 그래서 공갈 키보드 하나를 놓아주었다.
잠옷 차림으로 일해도 눈치 볼 일 없고 노동요를 실컷 듣고 가끔 불러도 뭐라 할 상사도 없다. 여기저기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일의 집중도도 높다. 길어지는 회의 시간에 속으로 한숨 지을 일도 없다.
다시 일하게 된다면 반드시 주 4일 근무제 회사이거나 재택이 가능한 회사, 그 이하로 타협할 수는 없다며 마음만 먹은 채로 퇴사했다. 일단 살고 봐야 했고 세상 늘어지게 쉬고 싶었다. "도전할 수 있는 모든 게으름과 자유에 도전할 것이며 마침내 그 끝을 맛보리라. 일이 년 놀면서 찾아보면 뭐든 못 찾겠어?"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협력업체에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일이 몰릴 때는 밥도 컴퓨터 앞에서 먹어야 할 정도지만 일이 없을 때는 그냥 몇 달을 논다. 그럴 땐 반 백수랑 동의어이다. 직장 생활 할 때보다 일도 수입도 적은 건 내가 너무 바라는 바이다. 최소한의 벌이만을 위해 노동하고 싶다. 그래서 물욕과 함께 할 수가 없다. 자유와 검소는 어울리지 않지만 동거해야 한다.
회사 밖은 지옥,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의 지출 내역을 써놓고 최대한 소비를 줄일 수 있는 품목을 가려보았다. 제일 안타깝지만 기부하고 있던 세 군데를 해지할 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 요금제는 가장 낮은 것으로 변경했고 이발은 집에서 직접 하면 괜찮을 것 같다. 아, 나의 유일한 사치인 때밀이만큼은 깊은 고뇌가 필요한 지점이다. 결국 횟수를 줄여서 분기별로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옷 안 사기, 책은 대출해서 읽기, 부모님 용돈도 줄이기로 했고 고양이의 캔도 한 단계 저렴한 것으로 하향 조정하였다. 고통 분담 차원에서 우리 고양이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마트를 안 가야 한다. 집에 현재 있는 것만을 최대한 활용하여 요리를 하는, 냉장고만 파먹는다는 냉파족으로 살기로 했다.
회사가 전쟁이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란 말은 나에겐 틀릴 수 있다. 의외로 놀란 것은 회사 밖 세상은 생각보다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시간을 나 스스로 운영하여 쓰기 때문에 평일 낮 잠깐의 취미나 문화생활이 가능해서 나를 더욱더 사람처럼 살게 한다. 하고 싶은 게 많아져서 여차하면 또 바쁘게 살 뻔 했을 정도이다. 한낮의 햇살 산책만으로도 남는 장사이다.
퇴사를 간절히 꿈꾸되 실천할 수 없는 수많은 한반도 직장인들이여. 그대들의 꿈을 내가 대표하여 대리 실천한다는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여유롭게 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