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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식주연구회는 접수 마감일인 2020년 11월 3일 오후 4시쯤, 예비 마을기업 사업신청서를 첨부 자료들과 함께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접수했다. 사실 우리는 신청서를 작성하며, 협동조합 설립도 동시에 진행했다. 마을기업에 선정이 되든 안 되든 협동조합을 최대한 빨리 설립해서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업신청서 접수 후 작성 중이던 협동조합 관련 서류들을 바로 진행하려 했으나, 남편과 마을기업을 제안한 분이 잠시 숨을 고르자고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한숨 돌리자고 요구한 이 두 사람이 협동조합을 빨리 설립하자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당사자들이다.

제안한 분이야 환갑을 넘겼으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에 질투심이 강한 남편은 체력과 의지력마저 나약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장점은 뭐란 말인가.

"아니, 사업신청서 쓴 게 그렇게 힘들어? 함께 작업한 나는 까딱없잖아."
"정신적으로 힘들어. 숨이 까딱 넘어갈 정도라니까."
"체력도 없어, 의지력도 약해, 도대체 잘하는 게 뭐냐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뭐 결혼 하나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남편은 경솔의 아이콘에다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에 질투심이 강하고 체력과 의지력도 나약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말할 줄 아는 진솔한 남자였다. 그래서 용서하기로 했다. 3일만 쉬겠다는 걸, 그간 고생 많았으니 일주일간 푹 쉬라고 격려해줬다.

일주일 뒤, 마을 앞 가로수들이 시큼하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리산의 박남준 시인이 '산수유 꽃 나락'이라는 시에서 노래한, '지난 겨우내 안으로 안으로만 모아 둔 햇살, 폭죽처럼 터뜨리며 피어난, 노란 산수유 꽃'들이 붉은 열매가 되어 훨훨 불타오르고 있었다.

우리 마을을 관통하는 2km의 도로 양쪽에는 산수유나무 500여 그루가 가로수로 자라고 있다. 그런데 20년 동안 노란 꽃과 붉은 열매로 시각적 자극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였지, 산수유나무는 경제적 자극에는 무관심한, 애매모호하고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시각적 자극에만 열일하던 산수유 열매
시각적 자극에만 열일하던 산수유 열매 ⓒ 노일영
 
여하튼 협동조합에 관련된 서류는 분열을 멈추지 않는 암세포처럼 늘어나고 있는데, 남편은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며 탱자탱자 뒹굴며 자빠져 있는데, 마을의 가로수에 붙은 불길의 형세는 심상치 않았다. 내버려 뒀다간 오랜만에 움트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열망도 깡그리 잿더미로 만들 기세였다.

상황은 이러한데, 남편은 온갖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협동조합 서류를 요리조리 피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고 뭐고 간에, 암세포처럼 무한 증식하는 협동조합 서류들을 산수유 불구덩이에다 던져버리고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고 싶었다.

마을 회관에 다녀온 남편은 쌀쌀한 날씨에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문서 작업을 하고 있는 내 옆으로 다소곳하게 다가왔다.

작당모의

"아저씨 아줌마들이 산수유 열매 빨리 털자는데, 어쩌지?"
"협동조합 서류는?"
"협동조합 서류는 1년 내내 언제든 쓸 수 있지만, 열매 터는 건 1년에 한 번뿐이라면서."
"20년 동안 뭐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그게 그렇게 급한지 모르겠네. 산수유 상품화 사업은 내년부터 진행하는 거잖아."
"나도 당연히 그렇게 말했지, 내년부터 하자고. 근데 우리가 출자금이 얼마 안 되니까, 산수유 열매로 돈을 좀 만들어 놓자고 다들 그러네."


이 인간이 산수유 작업을 핑계 삼아 협동조합 서류들로부터 현실도피를 하려고 동네 주민들을 들쑤신 게 틀림없었다. 하여간 이 인간은 잠시라도 느슨하게 풀어주면 이렇게 어설픈 잔머리부터 굴린다.

"어떻게 열매를 털려고?"
"터는 기계가 있더라고."
"씨는 어떻게 뺄 건데?"
"씨 빼는 기계가 중고로 나온 게 있어서."


하아, 이것 봐라, 서류한테서 도망치려고 필사적으로 준비했네, 하지만 그래 봐야 당신은 경솔의 아이콘!

"작업하려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데?"
"17명."
"마을기업에 참여하는 주민들 다? 나 빼고 다 한다고 했다고?"
"응, 당신은 서류 작업해야 하니까 우리끼리 하려고."


기가 찼다. 이 서류의 무덤에 나 혼자 내던져 둔다고? 이 인간은 전쟁터에서 전우를 버리고 달아날 의리 없는 놈이다.

나 몰래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있었다. 침을 튀기며 말하는 남편의 몸에서 호박씨가 하나씩 하나씩 툭툭 떨어지더니, 곧이어 와르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남편은 얼마나 큰 뒷구멍에서 이 엄청난 양의 호박씨를 깠을까?

예초기에 부착해서 사용하는 과실 수확기 2대는 이미 주문한 상태였고, 경북 영천에 있는 중고기계회사 사장과도 열매의 씨를 빼는 '산수유 제피기'에 관해서 의논을 마친 모양이었다. 일단 마을기업을 제안한 분과 남편이 먼저 대금을 치르고, 나중에 조합에서 천천히 갚기로 했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무릎 꿇은 남편

일방적 통보라니! 내가 가지도 않은 곳에서 찍힌 과속과태료 통지서를 받았을 때처럼 내 몸을 찢고 야수가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남편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갑자기 무릎을 철퍼덕 꿇었다.

"남자가 무릎을 꿇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그놈의 무릎 타령 지겹다, 지겨워. 며칠 전에도 술 마시고 늦게 와서 현관에서 바로 무릎 꿇었잖아. 그 무릎은 자동으로 꿇어지잖아."
"아니야, 내 무릎은 오토가 아니라 기어를 넣어야 움직이는 수동 변속기라고. 그때는 1단이었고 지금은 5단 정도지. 암튼 요즘 좀 예민한 것 같아서, 이런 하찮은 일까지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이게 하찮은 일이라고? 그러면 중요한 일은 뭔데?"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의 건강과 행복이지."


매번 유들유들하고 능글능글한 말솜씨에 속아 넘어간 뒤 후회하지만, 이번에도 피식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남편은 염치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도 미꾸라지처럼 약삭빠르게 빠져나가는 재주가 있다.

여하튼 남편의 상태를 보니, 단지 협동조합 서류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아닌 듯했다. 서늘한 기온에도 땀을 삐질삐질 흘렸고, 동공은 확장되어 있었으며, 빠르게 쿵쾅대는 심장 박동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남편은 흥분 상태였다. 남편이 뭔가에 저렇게 몰두하는 모습을 본 지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씨 빼는 기계는 얼만데?"
"120만 원이라고 해서 각각 60만 원씩 내기로 했어."
"중고라며?"
"새 걸로 사려면 엄청 비싸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120이면 고장 난 거 아닌가?"
"기계는 확실하다고 사장이 보장한다고 하더라고."
"언제 갈 건데?"
"내일."


모레도 아니고 내일이라···. 과연 콩을 번갯불에 구워 먹을 수 있을까? 번개의 전기량(電氣量)은 보통 1회에 전압 10억V(볼트), 전류 수만A(암페어)에 달한다고 하는데, 콩은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을 것 같다. 남편의 입을 번갯불로 때려버리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고개 숙인 '거래의 달인'

다음날 아침 마을회관 앞, 1톤 트럭에 비장한 표정의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제안한 분은 조수석에 앉아 상기된 얼굴로 위풍당당하게 도열한 주민들을 쳐다봤고,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잠시 먼 하늘을 응시하다가 회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웅변조의 말투였다.

"저희가 무조건 100만 원에 산수유 제피기를 가져오겠습니다. 저도 왕년에 거래의 달인이라 불렸던 적이 있었으니깐요."

거래의 달인?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하지만 열광의 도가니로 변한 분위기에 휩쓸려, 터무니없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내가 남편의 진면목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 희망이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해 보였던 것은, 함께 가는 분이 그래도 사업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거래의 달인도 흥정에 실패한 중고 산수유 제피기
거래의 달인도 흥정에 실패한 중고 산수유 제피기 ⓒ 노일영
 
두 남자가 트럭의 짐칸에 산수유 제피기를 싣고 돌아온 것은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트럭에서 내리는 그들은 몇 시간 사이에 몹시도 초췌해진 몰골이었다.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기계를 내리고, 전원을 연결해서 작동이 잘 되는지 확인했는데, 잘은 모르지만 일단 움직이긴 움직였다.

남편은 자꾸만 주민들을 피해 마을회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내가 질문으로 남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이거 얼마에 샀어? 남편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이야, 중고기계 사장, 그 양반 완전 달인이더라고."
"달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 양반한테 거래하는 법을 좀 배우고 싶더라고."
"그래서 얼마 주고 저걸 샀는데?"
"120만 원."


마을에서 그나마 경운기를 스스로 좀 고쳐 본 분이 산수유 제피기를 분해하며 내부를 청소하기 시작했는데, 허접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그래도 그냥저냥 쓸 만하다는 소견을 밝혔다. 다만 장담은 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았다. 남편은 주민들의 탄식과 한탄을 뒤로 하고 냅다 내빼고 있었다.

저 멀리서 내일부터 산수유 열매를 털자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치겠네, 또 내일?

#마을기업 #협동조합#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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