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노오력이 부족하다'는 자조적 표현이 인터넷을 넘어 일상에서까지 유행하고 있다.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학교에서부터 취업시장, 직장생활에 이르는 생애 전반을 치열한 무한경쟁 속에서 보내는 현실. 그 과열된 경쟁 속에서 고통받는 보통 사람들을 향해, 구조적 문제의 해결보다는 개인의 노력 여부를 탓하기만 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 '노오력이 부족하다'는 표현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노력하기만 하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의 뿌리는 어쩌면 많은 이들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오래되고 또 견고한 것일지도 모른다. 6월의 초여름 더위가 깊어져 가는 요즘, 일본에서 군사사를 공부하고 있는 나는 77년 전 이맘때의 어느 해전을 생각하게 된다.
1944년 6월 19일에서 20일까지 이틀에 걸쳐, 마리아나 제도 부근 해상에서 미 해군과 일본 해군이 격돌했다. 한국에서는 보통 미국 측 표기를 따라 필리핀 해 해전으로, 일본에서는 마리아나 오키 해전(マリアナ沖海戦)으로 불리는 싸움이다.
이 해전에 양측이 동원한 전력은 가공할만한 규모였다. 항공전력만 헤아려도, 공격 측인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9척에 항공기 750여 대, 방어 측인 미 해군은 항공모함 15척에 956대의 항공기를 투입했다. 한국 해군이 2020년 경항모 도입을 확정 짓고도 여전히 군 내외의 우려 속에서 진통을 앓고 있고, 미 해군과 패권을 다투려 한다는 중국 해군이 아직도 3번째 항공모함을 건조 중인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1944년 6월 미일 양측이 동원한 항공함대 전력은 오늘날 실전에서 다시 재현되기 어려울 규모임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사상 최대 규모의 함대항공전'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 해군이 이 공격에 그야말로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역에서 대패한 이후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패배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채 막대한 손실을 이어갔다.
마침내 대본영(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은, 전쟁을 계속하고 국민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절대국방권'(絶対国防圏)을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허울뿐인 절대국방권의 붕괴를 막아낼 재간은 없었다.
실제로, 필리핀 해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이던 1944년 6월 15일에는 절대국방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이판에 미군이 상륙했으니, 당시의 전황은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웠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해군은 오늘날 한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영혼까지 끌어 모아' 반전을 시도했다. 그것이 바로 '필리핀 해 해전'이다.
1944년 5월 3일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전황을 일시에 만회할 수 있는' 아호 작전(あ号作戦)을 입안했다. 도서 지역 기지들에 있는 항공대와 기동부대를 총동원해 미 기동부대를 일거에 격멸한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전력의 질과 양 모두 일본군이 열세이던 상황. 일본 해군의 거의 유일한 우위는 항공기의 항속거리였다. 미군기보다 700~800km 더 긴 이 항속거리의 우위를 이용해, 미 기동함대가 손을 쓸 수 없는 거리에서 적을 타격한다는 아웃레인지 전법은 아호작전의 핵심이 됐다. 즉, 장거리 기습을 실시하는 조종사의 역량이 전적으로 작전의 성패를 좌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저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미 거듭된 패전 속에서 베테랑 조종사들을 다수 잃었던 일본 해군은, 작전을 앞둔 상황에서도 훈련조차 실시할 수 없었다. 일본군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출동한 미 해군 잠수함이 바다를 장악했던 것이다. 잠수함 때문에 항공모함을 움직일 수 없게 되면서, 훈련은 결국 '지도상의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대체됐다.
미 해군은 연합함대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福留繫) 중장의 기밀문서를 입수, 아웃레인지 전법을 비롯한 일본군의 작전개요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쿠도메 참모장이 면피로 일관한 탓에, 일본 해군은 작전내용이 유출된지도 모른 채 6월 13일 함대를 출동시켰다. 비극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합함대는 출동과 함께 '황국의 흥폐가 이 일전에 달렸다'고 선언했다. 그 부담을 그대로 지고서 6월 19일 출격한 일본군 조종사들을 기다리던 것은, 신형 레이더와 F6F헬켓 전투기, VT신관과 같은 압도적 수준의 무기체계로 중무장한 미군의 포화였다. 실전경험도, 훈련경험도 부족한 일본군 조종사들이 빈약한 무장으로 미군의 공격을 당해내는 것은 불가했다. 19일에 출동했던 함재기 대부분이 복귀하지 못했음에도, 끝내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던 연합함대 지휘부는 다음 날 20일에도 작전을 이어갔다.
그 고집은 더 큰 파국으로 이어졌다. 격전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복귀한 소수의 조종사들은, 미군의 공격으로 불타며 가라 앉고 있던 자신들의 모함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해전에 조종사로 참전했던 이케다 이와마츠(池田岩松)씨는 2007년 NHK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연료가 다 떨어지고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어요. 그때까지의 삶이 머리에 떠오르더군요. 부모님, 동네아이들, 친구들, 고향, 이런 것들로 머리에 꽉 차더군요. 무서웠어요.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없어요."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항모 3척과 항공기 476기를 잃었다. 전사하거나 실종된 일본군 병사들만 3500여 명. 일본으로서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었지만, 그들이 손에 쥐게 된 것은 재기 불능의 피해 뿐이었다. 전략 단계에서의 모순, 온갖 악조건과 열세에도 불구하고 군인 개개인의 '노오력'에 의존하여 반전을 기대했던 일본군의 정신력제일주의는, 그렇게 마리아나의 먼 바다에 침몰하고 만 것이다.
그때로부터 77년이 지난 오늘. 구조적 모순을 외면한 채 개인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세태는 여전히 견고해 보인다. 이 무한경쟁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결국은 성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속삭임을 들으며, 나는 새삼 필리핀 해 해전을 되돌아본다. 일본군 조종사들이 좀 더 노력했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바뀌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