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불운한 가정에서 흙수저로 태어나 불우하게 젊은 날을 산 최시형은 산골마을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세상사를 익혔다. 깊은 산간의 검곡(劍谷) 마을에까지 들어가 살게 되었다. 물려받은 땅 한 뙈기 없어서 아내와 함께 여기저기 옮겨다닌 잦은 이사가 인심을 알고 세태를 살피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실상 검곡은 정상적인 마을과는 동떨어진 화전민이나 사는 지역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산 중턱에는 화전을 일구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해월 신사는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화전민으로 살아갔다.
해월 신사가 동학에 입도하기 전, 나이 30이 넘어 화전민의 삶을 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현실적 삶이 어려웠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가진 땅 한 평 없이, 가진 재산도 없이 살 수가 없어, 깊은 산간 화전민 마을을 찾아올라 갔던 것이다. 이러한 해월 신사의 삶이란 결국 가난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고난의 삶이었으며, 당시로서는 가장 소외받는 하층민의 삶이 아닐 수 없다. (주석 7)
"사람은 두 번 탄생하는 것이다. 하나는 세상에 태어날 때의 탄생, 또 하나의 생활에 들어가는 탄생인 것이다." - Jㆍ루소, 『에밀』
불우한 청년 최시형은 맑은 정신으로 노력하며 살고자 했으나 세상사는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해월 신사가 대신사를 만나기 전, 그러므로 '동학의 가르침'을 받기 그 이전의 해월 신사는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아무러한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던 계층의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머슴, 한 사람의 용인(庸人), 한 사람의 화전민(火田民)이라는, 당시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의 외롭고 또 가난한 한 사람에 불과했었다." (주석 8)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섭리였는지, 최시형의 인근에서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진작부터 수운 최제우의 존재와 파격적인 발언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다.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고,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그래선지 따르는 사람도 많다고 하고, 세상은 곧 천지개벽할 것이라는 풍문도 따랐다.
최제우가 득도하여 1861년 6월부터 포덕을 시작하자 어진 선비들과 백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11월에는 지방 유생들이 그를 서학쟁이로 몰아 발고하면서 관으로부터 탄압이 따르자 호남지방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에 은거하였다. 이때에 「논학문」ㆍ「수덕문」등을 지었다. 이듬해 7월 호남을 떠나 경주부 청송으로 돌아와서 백사길과 박여대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관의 탄압이 더욱 심해져서 포덕 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포덕을 처음 시작할 무렵에 최시형은 경주 용담정으로 최제우를 찾아갔다.
대신사께서 경신년 4월 초 5일 득도를 한 후 1년이 지난 신유년에 이르러 포덕을 하게 되자 해월신사는 경주 용담정으로 찾아가 대신사의 가르침을 받고 입도를 하였다. 입도한 해월신사는 한 달에 서너번 씩 대신사를 찾아 뵙고 설교, 강론을 듣고 도법(道法)을 배우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하루는 "대신사께서 독공하실 때 한울님 말씀을 들었다 하니 내 성력을 다 하여 한울님 마음을 움직이게 하리라" 하고, 추운 겨울 날 집 아래 계곡의 찬물에 매일 목욕을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계속하자 물이 차지 않고 밤이 어둡지 않는 듯 하더니 문득 공중으로부터 '양신소해 우한천지급좌(陽身所害 又寒泉之急坐)'라는 소리가 들리므로 냉수욕을 중단하였다. 신사께서 이 말씀을 들은 후 대신사를 뵙고 이 상황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더니 대신사께서 "그대가 한울님 말씀을 들은 시간은 내가 수덕문을 읊던 시간이니 나의 글 읊는 소리가 그대의 귀에 영감으로 들린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수련을 거듭한 해월신사는 이해 3월에 대신사로부터 '포덕에 종사하라'는 명교를 받고 영해ㆍ영덕ㆍ상주ㆍ홍해ㆍ예천ㆍ청도 등지를 순회하여 많은 포덕을 하였는데 이때 검악포덕(劍岳布德)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주석 9)
최제우는 자신의 신변에 머잖아 변고가 닥칠 것을 예상하고, 동학의 교단을 지키기 위해 최시형으로 하여금 후계체제를 갖추도록 하였다. 1863년 7월 23일 최제우는 40~50명의 도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시형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하였다. 북도중주인이란 경주이북 지역의 도중(道中)을 말한다.
마침 경상(최시형)이 오자 오랫 동안 상담하고 나서 특별히 북도중주인으로 정하였다. 선생은 탄식하며 노여운 기색을 보이는 듯 하다가 다시 기색을 가라앉히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르기를 진실로 성공자(成功者)는 가는 것이다. 이 운수를 생각하니 필시 그대 때문에 생겨났다.
이제부터 도의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여 나의 가르침에 어김이 없도록 하라.
경상은, 어찌하여 이런 훈계말씀을 하십니까 하자 선생은 이는 곳 운이니라 난들 운이니 어찌하랴. 그대는 마땅히 명심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경상은 다시 말하기를 선생의 교훈의 말씀은 저에게 과분하다고 하였다. 선생은 웃으시며 일인즉 그리되었다. 걱정하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주석 10)
최제우는 여기서 "성공자는 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자신이 할 일은 다 하였으니 이제 후사를 넘긴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경주 남쪽(南道中)은 수운이 직접 관할하고 북쪽(北道中)은 해월이 분담하여 관할하였다. 북도중 지역은 경주북산중(검곡일대), 영일, 청하, 영덕, 영해, 평해, 진보, 안동, 영양, 단양, 신녕, 예천, 상주, 보은 등이다. 『해월선생문집』에는 "지금부터 해월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였으니 내왕하는 도인들은 먼저 검곡을 거쳐 오라"고 명하였다 한다. 이런 조치는 후계자에게 권위를 실어주기 위한 배려라고 보인다. (주석 11)
흔히 동학의 조직을 두고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을 북접(北接), 전라도 지역을 남접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어서 동학혁명기에 남접은 무장봉기를, 북접은 이를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전봉준의 얘기를 들어본다.
문 : 동학 가운데 남접 북접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있는데 무엇에 의하여 남북을 구분하는가?
답 : 호이남(湖以南)을 칭하여 남접이라 하고 호중(湖中)을 칭하여 북접이라 한다. (주석 12)
남접과 북접이란 용어는 상호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북접이란 동학 도통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용어로, 남접은 호이남의 동학조직 즉 전라도 일대의 동학조직을 편의상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주석 13)
주석
7> 윤석산, 「해월 신사의 생애와 리더십」, 『해월신사순도 120주년 옥천학술대회』, 2018, 천도교 중앙총부.
8> 앞과 같음.
9> 한국동학학회 편집부, 「동학의 문화유적순례(1)」, 『동학연구(8)』, 238쪽, 2001.
10> 『최선생문집 도원기서』
11> 표영삼, 『동학 1: 수운의 삶과 생각』, 233~234쪽, 통나무, 2004.
12> 「전봉준 공초 재초문목」, 『동학란기록 하』, 536쪽, 1895년 2월 11일.
13> 박맹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대한 재검토」, 『동학연구 9ㆍ10』, 115쪽, 200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