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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아 동학을 민중 속으로 더 넓게 전포한 해월 최시형 선생 (이 사진은 해월 선생이 처형 당하기 직전 찍은 사진에, 1900년에 몸통 부분을 편집하여 제작한 사진이다)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아 동학을 민중 속으로 더 넓게 전포한 해월 최시형 선생 (이 사진은 해월 선생이 처형 당하기 직전 찍은 사진에, 1900년에 몸통 부분을 편집하여 제작한 사진이다) ⓒ 박길수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지만 기득권층은 개혁ㆍ진보ㆍ혁신세력을 적대시한다.

조선 후기의 양반 사대부들도 다르지 않았다. 거듭하여 관청에 최제우를 발고하고, 관에서는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것을 불온시하면서 감시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세를 훤히 꿰고 있던 최제우는 후계체제를 서둘렀고, 동학 초기의 많은 제자 중에 도드라지지 않았던 최시형에게 도통을 넘긴 것은 무엇때문일까. 15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글로벌기업은 물론 대부분의 기업이 경영권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심지어 교회의 목사직까지 세습하는 세태이다.    

최제우가 남원에서 돌아와 경주 박대여의 집에 은신하고 있을 때 최시형은 틈나는 대로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비록 3년의 터울이지만 만날수록 경외심이 생겼다.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스승으로 섬겼다. 스승도 총명하고 소탈한 그를 무척 아껴주었다. 

최시형의 동학 입도 경위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1861년 최제우로부터 직립, 동학의 가르침을 전해받고 입도했다는 설과 1866년에 강원도 간성에 사는 필묵상 박춘서(朴春瑞)에게서 동학을 전수받아 입도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최제우의 일대기를 담은 『도원기서(道源記書)』나 『수운행록(水雲行錄)』 등에는 최시형이 이미 1862년 3월 이전부터 동학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로 미루어 최제우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입도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남원에서 7월에 돌아온 대신사는 경주 서면 박대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 문득 대신사가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어 찾아가니 대신사가 반가히 맞아주었다. 신사는 수행 중 "양신소해 우한천지급좌(陽身所害 又寒泉之急座)"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대신사는 "큰 조화를 받은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남원에서 수덕문을 초하여 읽을 때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신사는 비로소 천어(天語)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주석 1)

최제우가 자기 운명의 막바지에서 최시형에게 도통을 넘긴 뒤 5개월 여 만에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대구 관덕당에서 참형을 받아 순도하고, 그 제자와 도인들도 엄청난 핍박을 받았지만 동학이 전국으로 확산하고 도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제2세 교조 최시형의 역할 때문이었다. 

동학의 초기 자료인 『도원기서(道源記書)』 등에는 이와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서는 이들을 종합하여 현대문으로 정리한 내용을, 다소 장황하지면 동학의 역사와 최시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대목이어서 소개한다. 
 
수운 최제우 동상 수운 최제우 선생 동상이다.
수운 최제우 동상수운 최제우 선생 동상이다. ⓒ 김환대
 
각지 도인들에게 칼 노래를 가르쳐주던 해월은 9월 한가위가 가까워 오자 추석을 집안 식구와 함께 보낼 심산으로 검곡에 돌아왔다. 팔월 열 나흘날 아침에도 그는 동틀 때부터 연못에 나가 목욕을 하고 뜰과 마당을 깨끗이 쓴 후에 수심정기하고 정좌하였다. 강령주문(降靈呪文)을 3천독하고 심고하는 중에 피뜩 영감이 일어났다. 즉 용담정에 계신 스승님이 자기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가 곧 조반도 먹지 않고 사십리 길을 달려 용담에 이르니 스승님은 방에 홀로 앉아 묵념하고 있었다. 해월이 인사를 올리니 스승님은 회색이 만면 반겨 주신다.

"해월 그대가 웬일인가? 내일이 추석인데 왜 집에서 명절을 쇠지 않고 오나?"

"네. 추석을 쇠려고 집에 있다가 심고 중에 선생님을 뵙고 싶어서 달려오는 길입니다."

"오, 그랬나? 아무튼 잘 왔네. 실은 나도 그대를 보고 싶었네."

해월이 수운의 뒤를 따라 도장(道場)에 들어가니 방바닥에 돗자리가 한 장 깔려 있었다. 전에 없던 일에 해월은 영문을 몰라 당황하였다. 

"해월. 저리로 않게."

해월이 선생님이 가리키는 돗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앉으니 스승님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정면으로 쏘아 보시는데 두 눈에 섬광이 번쩍이는 듯 하였다. 한참 그렇게 보고 있더니 이윽고

"몸을 움직여 보라!" 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해월은 움직이려고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팔다리는 물론 입까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해월이 움직일려고 애쓰는 것을 바라보던 스승님은 다시 굳은 표정을 풀고 빙그레 웃으신다.  

"이 사람아, 움직이라니까 왜 그러고 있나?"

말이 끝나자 비로소 해월의 몸이 풀어져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선생님, 죄송하옵니다. 어쩐 일인지 선생님께서 저를 쏘아 보신 뒤로 몸을 통 움직일 수가 없고 말도 나오지 않았사옵니다."

"그게 바로 그대 마음이 내 마음과 하나가 된 증거일세. 천지 만물은 본래 한 마음 한 기운인데, 세상 사람들이 이를 모르고 각각 자기의 육신에서 나오는 사리사욕에 마음을 빼앗겨 서로의 마음과 기운이 통하지 않는 것일세. 나와 그대는 이미 도력(道力)으로 그 기운을 통하였으니 내 마음이 곧 그대 마음이어서 한마음처럼 움직여진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다행이야."  

말씀을 마치자 스승님은 「수심정기(守心正氣)」넉자가 적힌 종이 한 장과 「용담수류사해원ㆍ검악춘회일세화(龍潭水流四海源ㆍ劍岳春回 一世花)」라 쓴 족자 한 장을 내어주신다. 

"이것이 그대의 장래이니 잘 보전하게.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대가 나를 대신해서 무극대도의 도통을 이어받았네."

해월은 정신이 아득하고 몸이 떨려 어쩔 줄 몰랐다. 

"선생님! 이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저는 무식하고 천한 사람이옵니다. 저 같은 놈더러 무극대도의 대통을 이으라 하심은 천만 부당한 말씀인 줄 아옵니다."

"아니야. '사시지서성공자거(四時之序成功者去)'라 하였으니 성공한 자는 가고, 새 사람이 나와 일을 맡는 것이 천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나는 가야 할 때가 되었나 보네. 그대에게 모든 일을 당부하고 갈 터이니 그리 알게."

해월은 더욱 참담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선생님! 가신다니요? 어디로 가신단 말씀입니까? 저희들을 두고 가신다니 이제 어찌 된 일이옵니까?"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그는 방바닥에 엎디어 울었다. 슬픔이 복바쳐 어쩔 줄 모르는 제자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스승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해월, 슬퍼할 것 없네. 이것이 모두 천명(天命)이라네. 후천 5만년의 개벽운수가 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이야. 부디 그대는 천명을 따르게나." (주석 2)


주석
1> 표영삼, 앞의 책, 27쪽.
2> 최동희, 『민중의 메시아 해월 최시형』, 56~59쪽, 태극출판사, 1970.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월#최시형평전#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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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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