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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동학 교당에 게시되어 있는 최제우 공식 영정
전국 동학 교당에 게시되어 있는 최제우 공식 영정 ⓒ 추연창
최시형의 생애는 최제우와 떼어놓고는 상상할 수 없다.

앞에서 소개한 루소의 '두 번째 출생론'과 연관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스승의 뜻에 따라 산간마을에서 포교활동 중에 스승과 제자 23명이 체포되었다. 박씨부인과 맏아들 세정(世貞)까지 포박되어 경주부에 끌려갔다. 스승은 불원간에 포교들이 들이닥칠 것은 예견하고 그를 멀리 산간 마을에 피신시킨 것이다.

포교중이던 최시형은 교조가 대구감영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인들을 찾아다니며 옥바라지 비용을 모으는 등 대책을 서둘렀다. 소식을 들은 많은 도인들이 대구성중으로 모여들었다. 각 지역의 접주들이 중심이 되었다.

최시형은 현풍출신 동학도 곽덕원을 대구감영의 하인으로 분장시켜 교조에게 식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최제우는 최시형이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라고 명한다.

경상(해월)이 지금 성중에 있는가. 머지않아 잡으러 갈 것이니 내 말을 전하여 고비원주(高飛遠走)하게 하라. 만일 잡히면 매우 위태롭게 될 것이다. 번거롭게 여기지 말고 내 말을 꼭 전하라. (주석 3)

최제우는 이 자리에서 또 시 한 수를 읊으며 곽덕원에게 이를 도인들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사실상 최제우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유시(遺詩)이다.

 등불(燈)이 밝아 물 위에 아무러한 혐극(嫌隙)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다.

조정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없는 죄목을 만들어 씌우려 하지만 혐의를 잡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나는 그들의 손에 죽겠지만 나의 가르침은 마른 기둥 같으니 그 힘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함축한다.

세계의 성자들은 "높은 이상, 초인적인 의지,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신앙심(황필호)"으로 종교를 창도하고 진리를 설파하다가 당대의 권력에 의해 희생된다. 하지만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다." (주석 4)

최제우와 동학에 극도로 적대적인 지방관들로 구성된 심문관들은 경상감사 서헌순의 명의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최제우의 포교내용이나 『용담유사』 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사설(邪說)을 퍼뜨려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이유를 담았다. 「장계(狀啓)」는 오늘의 검찰 기소장이다. (주석 5)
 
 시미즈 도운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시미즈 도운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 서울옥션
 
최제우는 동학의 교통을 유지하고자 옥중에서도 자신의 가족보다 후계자로 점찍은 최시형에게 "고비원주(高飛遠走) - 멀리 피신하라"고 유언으로 남긴 채 참살 당하였다. 

이와는 다른 기록도 있다. 평생을 동학(혁명)연구에 바치고 최근 별세한 이이화의 견해이다. 최시형은 스승의 지침에 따라 산간마을을 다니며 포교활동을 하던 중 최제우의 체포 소식을 들었다. 

최시형은 대구로 몰래 들어와 감옥의 옥졸을 매수해서 옥졸의 차림새를 하고 밥을 들고 감옥의 최제우에게 접근했다. 최제우는 담뱃대를 최시형에게 건네주었다. 이를 받아들고 대구 감영을 나와 담뱃대를 쪼개보니 심지(心紙)에 '고비원주(高飛遠走:멀리 달아나라)'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또 "등잔불이 물 위에 비칠 적에 희미하다고 탓하지 말라. 기둥이 말라비틀어진 것 같지만 버틸 힘은 있는 것이니라"라는 싯귀도 적혀 있었다.

그 일루의 희망을 최시형에게 걸고 멀리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하라는 뜻이리라. 최시형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달아났고 그리하여 최제우의 시체를 거두지도 못하였고, 함께 죽은 도인들의 장례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주석 6)

최시형은 스승의 참형 소식을 듣고 심장이 에어왔다. 감성이 무뎌졌다. 분노를 삭일 시간도 없이, 마음의 일렁임을 안고서 스승의 가르침을 되살리고 유품을 정리하여 동학을 확산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기로 다짐한다. 72세로 처형당할 때까지 35년 동안 변함없이 매진하였다.

모든 조직의 기본은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신뢰에 있다. 해월 신사는 관으로부터 쫓기는 신세이면서도 스승인 수운 대신사의 유족이나 동지들을 한 때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늘 대신사의 유족을 보호하였으며, 혹 동지가 체포되었을 때는 이를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심고(心告)를 드리고, 구출을 위하여 늘 최선을 다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 사이에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견고한 신앙의 고리가 구축되어 있었다. (주석 7)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많은 제자와 교도들이 핍박을 받고 관리들이 두 눈에 쌍불을 켜며 뒤쫓고 있는 상황에서 최시형이 가야할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많은 배움을 받았고 스스로 깨달음을 더해 동학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하였다.

"해월 신사는 지극한 정성과 노력으로 동학적 수련에 임하므로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해월신사로 하여금 동학의 지도자로 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었고, 나아가 수많은 교도들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을 지니게 한 가장 중요한 바탕이었다고 하겠다." (주석 8)   

최시형은 동학을 이끌면서 기본을 '사람 섬기기'에 두었다. 그의 리더십의 본질이라 할 것이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 내 제군들을 보니 스스로 잘난 체하는 자가 많으니 한심한 일이요, 도에서 이탈되는 사람도 이래서 생기니 슬픈 일이로다. 나 또한 이런 마음이 생기려면 생길 수 있느니라. 이런 마음이 생기려면 생길 수 있으나 이런 마음을 감히 내지 않는 것은, 한울님을 내 마음에 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주석 9)     


주석
3> 『도원기서』
4> 『동경대전』, 「시문편」.
5> 김삼웅, 『수운 최제우평전』, 236~237쪽, 두레, 2000. 
6> 이이화, 「최시형」,『인물한국사』, 258쪽, 한길사, 1988.
7> 윤석산, 앞의 책, 38쪽.
8> 앞의 책, 26~27쪽.
9> 『천도교경전』, 「해월신사법설ㆍ대인접물」, 27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월#최시형평전#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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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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