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 산이 여길 둘러싸고 있는 꽃의 화심입니다. 그러므로 여긴 선인 독서, 신선이 책을 보는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2006년 6월. 고 최규하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다. 당시 언론은 묘역의 풍수에 주목했다.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은 현충원 중앙 현충탑에서 위쪽으로 맨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김진철 충남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학 교수는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을 "음과 양이 합쳐져 출발하는 '선인독서형국'"이라고 설명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 안장 때만 대전현충원의 풍수가 회자했던 건 아니다. 대전시 유성구 갑동 산 23-1번지. 대전현충원을 소개하는 누리집을 펼치자 그림과 함께 풍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담겨 있다.
문필봉을 조종산(祖宗山)으로 옥녀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으며, 명산인 계룡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삼고 있다. (중략) 문필봉은 형상이 붓끝같이 되어 있어 유래한 이름이며, 우뚝 빼어난 봉우리는 불길이 이는 듯하고, 이 불빛이 성역을 두루 비추고 있는 듯하다. 이 문필봉에서 다시 솟구쳐 내려 이룬 옥녀봉은 마치 옥녀가 금반(金盤)을 대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명산인 계룡산의 맥을 이어받은 문필봉과 옥녀봉을 정점으로 병풍처럼 둘러친 좌우 능선이 좌청룡·우백호를 이루고 있어 묘역으로 아주 이상적인 명당(明堂)자리다.
풍수지리에서 '혈'은 묫자리를 말하고, '주산'은 혈 뒤에 우뚝 속아 있는 산이다. 청룡은 혈을 왼쪽에서, 백호는 혈을 오른쪽에서 감싸주는 산줄기다. 한마디로 계룡산 옥녀봉이 혈의 뒤쪽에 있는 주산이고, 문필봉은 주산의 뒤에 있는 할아버지 산이다. 이 두 산을 정점으로 하여 펼쳐져 있는 명당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두리봉을 옥녀봉으로, 신성봉을 문필봉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전현충원 누리집에까지 풍수를 설명한 것은 부지 선정 당시 지형·지세를 주요하게 꼽았음을 보여준다.
대전현충원의 시작은 1974년 12월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중부 지역에 국립묘지 추가설치를 결정했다. 1953년 서울국립현충원을 결정할 때만 해도 풍수지리를 주요하게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제 2국립묘지 결정은 달랐다.
대전현충원의 한 관계자는 "2년여 동안 여러 후보지를 올려놓고 조사를 벌였고, 1976년 4월 14일 지금의 터로 최종 결정했다"며 "당시 부지 선택의 주요 기준 중 하나가 풍수였다"고 말했다. 한국역술인협회 측도 "대전 국립묘지 터를 잡는 기준의 하나로 지형·지세를 따졌다"고 설명했다.
실제 당시 자타가 인정하는 지관들이 모였다. 한국역술인협회에 따르면 결정적 역할을 한 지관은 지창룡(1922∼1999)이다. 지창룡은 대전 국립묘지뿐만 아니라 서울현충원, 정부중앙청사의 터를 잡는 데도 기여했다.
1979년 4월 착공을 시작해 6년여 만인 1985년 11월 13일 대전현충원이 준공했다. 이날 <대전일보>의 관련 기사 상당 부분이 풍수지리에 대한 설명이다.
대전 국립묘지가 위치한 지형은 그야말로 명당자리. 예부터 국내외에 널리 알려 알려진 명산인 계룡산이 국립묘지의 태조산이며, 그 맥을 이어받은 문필봉을 시조산으로 하고 주산인 옥녀봉(두리봉)을 정점으로 좌우 능선이 좌청룡, 우백호. 소하천이 서출동류하며 조향이 동남향인 이곳은 전국 어디서나 큰 불편 없이 찾아올 수 있다.
<대전일보>는 다음날 (11월 14일) 사설에서도 "대전 묘지가 들어선 위치 또한 명당자리라는 데 풍수학자들의 공통된 이야기"라며 그 이유를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국립현충원이 자리한 갑동에는 갑골, 원갑동, 장자터, 맷들, 평전말, 앉은바위, 점말, 송정리, 물방아양달 등의 마을이 있었다. 맷들은 앉은 바위 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매평(梅坪)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매화가 땅에 떨어지는 형국인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매들이라고 부르다가 맷들이 되었다. 또한 이 마을에는 덕명동에 있는 옥녀봉에 살던 옥녀가 손수 사용했던 맷돌이 날아와서 이곳에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맷돌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맷들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앉은바위'는 맷들 서남쪽, 현충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초기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자 공사 중일 때 왕자 이방원(뒤에 태종)이 앉아 쉬어간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지명의 유래는 물론 조선 도읍지 풍수와도 연결돼 있어 흥미롭다. 실제 현충원이 자리한 이 일대는 군인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현충원 자리인 갑동은 옛날 군인들의 갑옷을 만들던 곳이었다고 한다. 현충원 주산인 갑하산(甲下山) 능선에 올라서면 계룡산 '장군봉'이 바로 마주한다. 장군봉 아래가 '병사골'이다. '장군과 병사가 갑옷을 내려놓는 곳(甲下)'에 대전현충원이 들어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도 대전현충원은 풍수하는 사람들의 단골 연구주제다. 또 연구자마다 설명방식이 다소 다르다. 하지만 그 결론이 명당이라는 점에서 같다.
대전현충원은 신선봉과 두리봉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산이 둘러있고, 배산임수와 사신사가 혈장을 보호하는 최고의 자리이다. (금강일보, 권태달의 풍수 이야기 중)
대전현충원은 동·서·남·북의 산세가 사신사를 갖추어 장풍국을 이루기 때문에, 명당 지기가 바람에 의해 흩어지지 않고 항상 안락하게 머무는 공간이 된다. 풍수형국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을 이루고 있음으로 마치 어머니 품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영혼들을 포근히 감싸듯이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 명당형국이다. (영남일보, 박재락의 풍수로 본 명당)
대전현충원에 국가 원수 묘역이 마련되어 있다. 최규하 대통령만이 현재 이곳에 안장되었다. 아름답고 편안한 땅이다. (월간 조선, 김두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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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누리집에 소개된 풍수설명의 오류
'신성봉'을 '문필봉'으로, '두리봉'을 '옥녀봉'으로 잘못 소개
국립대전현충원은 누리집에 풍수를 "문필봉을 조종산(祖宗山)으로 옥녀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으며, 명산인 계룡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삼고 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지명이 잘못 표기되어 수정이 필요하다. 국토지리정보원이 발행한 '국토정보맵'에 따르면 조종산으로 소개한 '문필봉'은 '갑하산신성봉'의 오류이다. '문필봉'은 계룡산 관음봉과 연천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760m)로 대전현충원과는 거리가 멀다. 신성봉은 갑하산의 한 봉우리이지만 565m로 갑하산(469m)보다 높다. 대전시민들은 '신성봉'을 '신선봉'으로 알고 있다. 등산로상의 등산 안내 표지판이나 대전 둘레산길을 소개하는 안내 책자에는 모두 '신선봉'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국토정보맵을 보면 주산으로 소개한 '옥녀봉'은 현충원 정문 앞에 있는 유성CC의 뒷산(451.9m)이다. 현충탑 뒤의 실제 주산은 '두리봉'이다. 신성봉과 갑하산 사이의 능선에서 현충원 쪽으로 튀어나와 솟아있다. '월간 산'이 발행한 전국명산 지도 '우산봉~도덕봉' 편에는 산 높이가 389.9m로 기록되어 있다. 대전시지(大田市誌)에 갑하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있고 이 이 봉우리들이 불상을 닯았다 하여 삼불봉(三佛峰)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3개의 봉우리는 갑하산과 신성봉, 두리봉을 말한다.
이러한 오류는 1985년 11월 13일자 대전일보의 보도에서도 나타난다. 2면 기사에서 "계룡산이 국립묘지의 태조산이며, 그 맥을 이어받은 문필봉을 시조산으로 하고 주산인 옥녀봉을 정점으로(중략)"라고 전했다. 역시나 '신성봉'을 '문필봉'으로 '두리봉'을 '옥녀봉'으로 잘못 쓰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