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세대인 나에게 영상은 낯설었다. 영상이 주 매체가 되어가는 변화 속에 한동안 쭈뼛거리다가 유튜브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건 내가 좋아하는 걸그룹이 컴백을 한 시점이었다.
어릴 때처럼 음악방송을 방송사별로 챙겨볼 만큼의 여유와 관심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룹의 무대만 보고 싶을 때, 무대별로 보고 멤버 개인별 세로 직캠도 보고 싶을 때, 무대 교차 편집도 보고 싶고, 예전 활동 기간의 무대도 보고 싶고, 팬들이 분석해놓은 뮤직비디오 해석도 보고 싶을 때 유튜브 알고리즘은 아주 유용했다.
기획사에서 운용하는 각종 채널을 다 가입하고 시간을 챙겨 라이브 방송을 보지 않아도 내가 봐야 하는 건 유튜브에서 다 챙겨주었다. 물론 볼 게 너무 많아서 멈출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내가 왜 남의 아이를 보고 있지
그렇게 평화로운 덕질을 하던 내 유튜브 알고리즘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아기자기한 도시락 썸네일이 툭 등장했다. 평소 알록달록한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라 귀여운 비주얼에 홀려 들어가보니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부부가 아이를 키우며 기록하는 브이로그였다.
당근을 총총 채 썰어 달걀말이에 넣어 부치고, 아이가 안 먹는 양파와 버섯을 몰래 넣어 볶은 밥을 삼각김밥 틀에 넣어 뭉치고, 고기를 졸이고 어묵을 구워 아이의 유치원 도시락을 싸는 과정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가지런한 도마 소리 사이로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리거나, 부침개를 하려는 엄마에게 다가온 아이가 직접 반죽을 젓기도 하는 걸 보게 되었다. 한 편의 광고 영상처럼 가지런히 만들어진 살림 영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서툴게 일상을 담고 있는 브이로그인데 나도 모르게 연달아 몇 편을 보게 됐다. 그러고 나니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 피드 최상단에 같은 유튜버의 또 다른 영상을 추천해 줬다. 가끔 웬 모기나 공포 영상을 띄워 나를 기겁하게 하더니, 이번 추천은 나쁘지 않은 걸?
아이는 종종 한국을 오가면서 부산 사투리를 배웠는지, 일본어와 한국어를 야무지게 섞어 썼다. 요리를 해준 엄마에게 "엄마, 맛있게 만들어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니 생판 남인 내가 왜 이렇게 기특한지.
일본에 사는 것도 아니고, 도시락을 쌀 일도 없고, 아이도 키우지 않아서 따지고 보면 어떤 공감대도 없는데 이 평온한 브이로그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이상하게 기분 좋았다.
더 좋은 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다고 해서 옆에서 '너도 아기 낳을 때가 됐나 보다'라는 단골 멘트를 들을 일도 없다는 것이다. 댓글에서는 성별과 나이와 결혼 여부를 불문하고 모두가 똑같은 랜선 이모, 삼촌이니까.
알고리즘과 거리 두기
그렇게 며칠간 영상을 하나하나 보고 있었더니 유튜브가 비슷한 콘셉트의 새로운 채널을 띄웠다. 나의 원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인지 관련 채널로 확장해가고 싶지는 않아서 굳이 클릭하지 않고, 대신 원래 보던 유튜버를 구독했다.
굳이 구독하지 않아도 영상이 계속 뜨기 때문에 나에게 구독은 영상을 보기 위한 목적보다 이 채널의 팬으로서 지지를 보내는 의미에 가까운 것 같다. 사실 알고리즘을 적당히 끊어내고 어느 정도는 거리 두기를 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필요해서 접근한 콘텐츠가 아닌데도 묘한 샛길로 빠져들어서 어느새 엉뚱한 세계를 헤매고 있을 때가 있어서다.
물론 생각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게 신선하고 즐거울 때도 있지만, 알고리즘을 따라가다 보면 세계의 양면성이나 포괄적인 부분을 전반적으로 살피기보다 나의 관심사에 가까운 어느 일면이 세상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쉬운 듯하다.
어떨 때는 애플워치 후기를 검색하다가 아이패드부터 아이맥까지 사고 싶어지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이게 정말 내가 사고 싶은 것인지,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부추기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해보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정보에만 효율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관련 정보의 확장을 이어나가는 것. 이 둘 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내가 그 방대한 정보의 컨트롤 센터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면 낯선 파도에 휩쓸려 떠밀릴까 봐 겁이 날 때도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는데, 유튜브 알고리즘에 딱 맞는 이야기가 아닌지.
물론 유튜브 알고리즘이 생각지도 못하게 바다 너머 한 아이의 무해한 웃음으로 나를 이끌어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내가 아이를 귀여워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으니까.
다만 유튜브가 이끄는 대로 삶의 무게중심을 옮겨가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 두기와 적절한 밀당으로 함께하면 좋지 않을까. '유튜브 그만 봐!'라고 잔소리 할 사람이 없는 어른이라, 아직은 유튜브 알고리즘과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