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경기도를 대표하는 상업도시라고 할 수 있는 안성이었지만, 한동안 교통편이 발달하지 못해 발전의 속도가 다소 느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역이 가진 고유한 문화와 함께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두루 보존되지 않았나 싶다.
안성은 강원도처럼 높은 산은 없지만 그 어느 동네보다 풍부한 수자원을 보유한 덕분에 사방 어디를 가든 이름난 저수지 하나는 마주하게 된다. 안성을 대표하는 경관을 모아 만든 안성 8경 중 저수지가 두 개가 있으니 안성을 방문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우선 우리가 가볼 곳은 안성 시내에서 동쪽에 위치한 금광호수다. 1965년 9월에 준공된 금광호수는 비교적 편하게 접근할 수 있고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경치가 정말 빼어나다. 특히 차를 타고 호수 주위를 둘러보면 언덕배기를 넘을 때마다 다양한 모습의 경관이 나타난다.
호수의 규모가 산자락 계곡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뻗어있어 호수 전체를 걸어서 둘러보는 둘레길은 없지만 금광호수에서 경관이 가장 훌륭한 부분을 따로 떼어 박두진 문학길을 조성했다.
박두진의 마지막 집필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함께 발간하였고 그로 인해 청록파라고 일컬어지는 시인 박두진. 우리에겐 '해야 솟아라'의 구절이 들어간 <해>라는 시로 유명하다. 그 박두진이란 시인이 1916년 안성에서 태어났고, 안성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떠날 때까지 20여 년의 유년기를 이 도시에서 보냈다.
박두진의 문학적 상상력과 정서를 길러주던 기간으로, 서운산을 넘는 강렬한 햇빛과 짙푸른 하늘은 훗날 박두진 시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비록 생애의 남은 시간 대부분을 서울에서 활동했지만 말년의 집필실을 금광 호수변에 두고 그의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했다.
박두진 둘레길로 가기 위해서는 v자 모양의 호수를 한 바퀴 돌아 그 막다른 곳에 위치한 주차장에 내려 계단을 조금만 내려가야 한다. 곧 울창한 숲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이 펼쳐진다. 박두진 문학길은 이 수변 데크로드를 따라 혜산정, 수석정 까지 왕복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호수의 건너편에는 박두진이 집필에 전념한 작업실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카페가 들어서 있다고 한다. 박두진은 말년에 고요하고 한가로운 호수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시상(詩想)에 몰두했을 것이다. 한동안 빡빡했던 일상에 한숨 쉬어갈 수 있는 금광호수였다.
이제 안성을 떠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이런 헤어짐이 아쉬워서 가는 길에 안성을 대표하는 호수, 고삼호수에 잠깐 들려본다. 금광호수처럼 방문객을 위해 산책길이 특별하게 조성되진 않았지만 낚시터의 명성으로 유명한 만큼 곳곳에 자리한 낚싯배들과 강태공의 풍경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물안개 피어나는 몽환적인 풍경과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수상좌대 등이 마치 한 편의 수묵화 연상시키는 듯했다. 이런 독특한 경관으로 인해 실제로 영화 <섬>의 주요 촬영지로 쓰였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었던, 은하수 같은 마을
고삼호수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후 안성 여행의 종착지인 미리내 성지로 이동한다. 용인으로 들어가기 직전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다 보면 미산 저수지를 지나게 되고 그 길 끝에 거대한 규모의 미리내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라 할 수 있는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를 비롯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유서 깊은 성지다.
잠깐, 여기가 왜 미리내라고 붙여지게 되었는지 잠깐 짚고 넘어가자. 신유(1801), 기해(1839) 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이 마을에 숨어들어왔고,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밤이면 달빛 아래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은하수의 우리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주교에서 남다른 위상을 자랑하는 성지인 만큼 규모가 정말 대단하다. 미리내의 중심 구역으로 가려면 주차장에서 30여 분을 걸어야 하고, 볼거리가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결심을 단단히 하고 가야 한다.
우선 입구에서 오른편 언덕을 조금 올라가 보면 적당한 크기, 아늑해 보이는 오래된 성당이 눈에 띈다. 이 지역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강도영 신부가 1907년 돌로 쌓아서 만든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이다. 이 성당의 제대에는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뼈가 보관되어 있다. 유럽의 성당에 가면 성인의 일부 유해를 보관되어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한국에서 직접 보게 될 줄 몰랐다.
천주교 발전을 위한 김대건 신부의 의무는 죽어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한참을 길을 따라 들어간 끝에 거대한 규모의 성당을 발견했다. 그 장소가 바로 103위 순교 성인 시성을 기념하고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91년에 지어진 '한국 순교자 기념 성전'이라고 하는 곳이다.
막다른 산속에 이런 거대한 규모의 성당이 있다는 사실도 놀랐지만 그 건물 지하에 들어가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문당하거나 순교당하는 장면이 마네킹으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화살촉을 이용해 귀를 뚫어버리는 장면, 몽둥이로 무릎을 으깨는 고문, 군문효수에 이르기까지 눈 뜨고 보기 힘든 장면을 리얼하게 묘사해 놓았다.
그 당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순교했다. 봉건 질서에서 차별을 받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고수한 것이다. 부디 내세에서라도 행복하길 기원한다.
성전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엔 김대건 신부의 상이 서 있다. 과연 천주교에서 미리내가 가진 위상답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성전의 제대에는 김대건 신부의 종아리뼈가 모셔져 있다고 하는데 직접 확인을 하지 못했다.
이제 대성전 뒤편으로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1평 규모의 조그마한 경당이 보인다. 바로 그 앞에는 김대건 신부와 그에게 사제서품을 주신 페레올 주교의 묘 그리고 강도영 신부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가톨릭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25년의 짧은 일생을 보냈지만 난관을 뚫고 마카오로 가서 신부로 임명되었고, 그를 신문한 조선의 관리들도 5개의 국어에 능통한 그의 능력이 아까워 적극 배교를 권했다고 한다.
용산에 있는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그의 시신은 누구도 가져가지 못하게 군졸들이 엄히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17세의 소년 이민식이 몰래 시신을 빼내어 지금에 자리에 무사히 안장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8화에 걸쳐서 안성의 많은 장소들을 함께 둘러보았다. 안성 자체가 경주, 전주처럼 이름난 역사 도시가 아니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경기도에서 이만큼 도시의 정체성이 잘 보존되어있는 케이스는 드물지 않나 싶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안성이 알려지길 기대하며 경기 별곡 안성 편을 마무리 짓는다.
덧붙이는 글 | 경기별곡 시리즈의 1편은 9월 책으로 출판됩니다. 강연, 취재, 출판 등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ugzm@naver.com으로 부탁드립니다. 글을 쓴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시면 탁피디의 여행수다 또는 캡틴플레닛과 세계여행 팟캐스트에서도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별곡 시리즈는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general_list.aspx?SRS_CD=0000013244에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