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해! 어떡해!"
밥을 볶는데 난데없이 화끈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놀라서 어버버 하는 사이, 불은 또 그런 적 없다는 듯 휙 사라졌다. 다행이다, 할 것도 없이 나는 도마와 칼을 싱크대에 텅텅 던져 넣었다. 평소 같으면 오늘 굉장한 경험을 했다며 즐거워했을 텐데. 밥맛이 싹 도망갔다. 며칠간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가 문제냐. 스스로 물었다. 몇 년간 별것 아니라고 저리 밀어둔 "어떡해"들이 보였다. '알바를 그만두고 글에 전념해야 전업작가 비슷한 거라도 될 것 같은' 확신, '손가락 빨고 살 거냐!'라며 그에 반박하는 마음의 소리, 끼고 싶은 공모전은 많은데 써지는 건 없고, 그나마 내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건 이미 거장들이 알뜰히 사용했음을 거듭 확인한 허망함, 반복되는 가족 문제의 막막함, 주거환경에서 오는 소음 스트레스 등등.
한 마디로 내 짜증스러움의 정체는, '돈 없고 재능이 어중간하며 정신병을 가진 30대 후반 비혼 퀴어 예술가지망생'이 할 법한 고민의 총체였다. '이반지하여, 당신이라면 작금의 권태와 혼란을 어떻게 헤쳐나가겠는가?' 퀴어 아티스트이자 탁월한 유머리스트 '이반지하'. 마치 아는 사람처럼 그 이름을 떠올렸다.
'을'의 요소로 생이 가득한 자들이여
신기하게도 나는 이반지하를 몰랐다. 그가 2004년부터 공연해 온 전설적 퍼포머라는 것도, 현대미술가, 애니메이션 감독, 시트콤 각본가, 팟캐스트 방송인 등으로 빠지지 않는 재능을 펼쳐온 것도. 그러나 예사롭지 않은 책 표지를 본 순간, 사회 비주류만이 뿜어내는 강렬하고도 질긴 에너지를 감지해 버렸다. 발견과 동시에 책을 주문하고, 받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나의 촉은 뛰어났다.
에세이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는 퀴어로서의 이반지하뿐 아니라, 노동자, 생존자, 유머리스트, 예술가로서의 이야기가 각각 한 장을 맡고 있다. 책에 가득한 '을'의 이야기들은 진솔하고 적나라하다 못해, 읽는 이를 어딘가 겸허하게 만들어 버린다.
저는 지금 이 사회에서는 패배주의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 이상한 것 같아요. 경쟁에서 뽑히는 사람이 적을수록 떨어지는 사람은 그만큼 많은 거잖아요. 뭐, 그렇게 대단해서 패배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 <월간 이반지하> 10호
그렇게 마침내 나의 집이라는 곳은 작업할 때는 생활의 향기에 돌아버릴 것 같고, 집에서 쉬려고 할 때는 일의 향기에 헛구역질 나는 곳이 되었다. - '부동산과 예술하고저'
'예술하기로 한 죄'로 그의 일상에 화장실 타일의 물때처럼 틈틈이 낀 '존버'의 향기. 이걸 문장으로 맡다 보면 묘한 위안이 찾아온다. 정신승리라고만은 할 수 없는 깊은 통찰 때문이다. 억지 위로나 무한 긍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반지하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그가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선에는 오히려 따뜻함이 도드라진다.
나는 예술에서 중닭의 아름다움이 진하게 느껴질 때 완전히 매혹된다. 영원히 도달하거나 완성하지 못할 어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앞에서 못난이를 숨기지 않은 채 대놓고 '나는 그곳에 이르지 못했소! 나는 중닭이오! 하고 튀어나온 그 아름다움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다 바로 이런 중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 '중닭의 아름다움'
자신이 쌓은 벽에 갇힌 자들이여
이반지하처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이반지하밖에 없다. 신 내린 듯한 입담은 논외로 해도, '자유로운 글쓰기' 태도와 방식은 정제된 글 읽기에 길들여져온 안구에 상큼한 충격을 준다.
살면서 신체와 정신을 너무 일체시키면 안 되는 순간들이 오면 그때 그 복도가 생각나곤 한다. 물론 그렇게까지 생각나는 건 아닌데, 안 그러면 지금 글이 안 되니까 그렇게 써 본다. - '독수리 육체 정신'
그 말인즉슨, 억지 휴식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앞에 뭐든 쓰고 '~시대'라고 붙이면 꽤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주제에 시대를 꿰뚫는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도래한 시대 도래미'
이게 무슨 아무말인가? 예술가다운 '의식의 흐름' 기법. 당당한 태도에 헛웃음이 나는데 얄밉지가 않다. 오히려 숨통이 확 트인다. 맥락에 얽매이지 않고, 지면의 낭비(?)를 피하지 않으며, 모든 글쓰는 이들이 티내지 않으려 끙끙거릴 고민을 난데없이 그대로 써 버리기도 한다. '어떤 글을 써야 적당히 공감대를 이끌어내면서 통렬하고 시대를 반영하며 그와 동시에 나다움을 뽐낼 수 있을까'('독수리 육체 정신')라고.
그리고 이런 이반지하의 글쓰기는 그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 딱 맞는다. 책 전체를 아울러 이반지하는 말한다. 삶이란 정확히 계산해서 낭비 없이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불필요해 보이고 헛짓 같던 경험과 마음들이 삶이고, 그가 말한 '중닭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대단한 장기 기획을 가지고 만들어진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냥 삶이었기 때문이다. - '이반지하의 탄생'
내 인생을 내시경으로 훑은 듯한 일화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재능이 탐났다. 나는 왜 이 소재를 이렇게 써낼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나. 하지만 그의 시선과 문체는 그의 것이고, 나는 앞으로 나의 중닭스러움(또는 병아리다움)을 뽐내면 될 일. 분명 우리는 각각 종이 다른 중닭이다. 다만 이 질문은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굉장히 나 자신'('시, 시, 시작')인 순간을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
여기까지 살아낸 자들이여
이 책은 웃기다. 잘 웃지 않는 내가 약 3분 단위로 현실 웃음을 터뜨렸을 만큼. 하지만 결코 그게 다는 아니다. 넉살 좋은 위트와 풍자 속에 여성, '이반'(동성애자라는 뜻으로 과거 자주 사용되던 은어), 반지하살이 예술가, 알바 노동자로서의 고달픔뿐만 아니라 폭력 속에 살아온 내밀한 트라우마까지 담겨 있다. 이반지하 유머의 '중심에는 고통과 억압이 있다'.
세상아, 너는 두려워해야 할 거야. 나는 생존자거든. - '생존자'
생존자. 감히 내가 써도 될까, 싶은 말을 책이 슥 내밀어주었다. 이런저런 차이는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숱한 경쟁과 평가, 차별과 혐오와 자학, 때로는 물리적·정신적·언어적 폭력을 견디고 여기까지 왔다. 이반지하의 말마따나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사유로 괴상하고 혼란스럽고 통합될 수 없는 인격들'이다.
나 역시 정체성 혼란에 끝이 없다. 답이 없는 걸 알면서도 늘 답이 간절하다. 공감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 이반지하는 정신 없는 우리네 인생 문제를 간결히 요약한다.
저는 버티는게 핵심인 것 같습니다. (중략) 우리네 인생은 다 더럽다.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가지고 거기에 깃발 꽂고 이런게 아닌 것 같아요. 이것저것 두드려 보고, 아 이거 아닌가 싶으면 또 접었다가 딴 거 하고, 좀 치사하자. - <월간 이반지하> 2호 (책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
원해서 태어난 적 없는 우리가 이 삶을 산다는 것, 버텨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로가 필요한 활동이라서, 주기적으로 "이야! 우리 여기까지 살아냈다!"하면서 구심점을 잡아주고 축하하는 것이 나는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24절기, 가볍게 짤라서 hit it'
저자는 유튜브 채널 'IBANJIHA'에서 24절기를 기념하는 방송을 한다. "평생 산다고 생각하면 너무 힘드니까 한 달만 살아보자, 일주일만. 하루만. 한 시간만 살아보자"고 한 말에서 시작된 방송이다.
'원해서 태어난 건 아닌데'. 어린애 투정 같아서 한 번도 입밖에 내지 못한 말을 대신해 주고, 앞서 걸으며 나의 생존을 뒤돌아 확인하는 이 책이 있어서 외롭지 않다. 길고 가늘게, 소소하고 재밌게. 이반지하가 권하는 삶의 덕목을 되새기고 나면 마지못해 걷던 걸음이 약간은 달라진다. 이반지하식으로 말하자면, '신명 리틀빗(little bit)'.
자, 그럼 이제 내 "어떡해"에 대한 답은 다 나온 셈이다. 그가 뭐라고 할지는 안 들어도 알 수 있다.
뭘 하든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마음대로 사시면 돼요. - <월간 이반지하>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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