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이후 사라진 '코르셋'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부활했다. '여성다움'과 '아름다움'을 강요하며 여성들에게 가하는 사회적 억압, 구속을 상징하는 언어로서 말이다. 원래 코르셋은 여성들의 허리가 잘록하게 보이도록 꽉 조여 입는 속옷이었다. 그렇다면 브래지어나 거들 같은 속옷도 코르셋의 일환이겠다.
8월 초순 남편이 아이들 둘을 데리고 여름 휴가를 떠난 뒤, 나 홀로 집을 지키는 은혜(?)를 입었다. 일 년에 한 번 있을 법한 이 기회에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상상력 부족일까. 누군가에겐 전혀 새롭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일, 탈코르셋!
여름에도 브래지어에 러닝 셔츠에 반팔까지 껴입는 나에겐 획기적인 일이었다. 역시 티셔츠 하나만 입으니, 너무 허전했다. 결국 러닝 셔츠를 입고 말았는데... 2박 3일 후, 여행에서 돌아온 누군가가 나의 탈브라를 눈치채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모르더라. 에이, 괜히 혼자 신경쓰고 앉았네. 이렇게 나의 탈브라가 시작되었는데... 난 여기서 브라·탈브라가 단순히 개인 선택의 문제일까 의심한다.
속옷을 검사하던 여학교 시절
나의 중학교 시절을 소환해보자. 점심을 먹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예고도 없이 2학년 선도부(학생지도부) 언니들이 교실에 들이닥친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 얌전히 앉는다.
2, 3명의 언니들이 분단별로 앞에서부터 뒤로 천천히 움직인다. 언니들이 옆을 지나갈 때, 교복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다. 언니들은 유심히 아이들의 뒷모습도 살핀다. 그리고 가끔씩 수첩에 무언가 적는다.
어떤 상황일까. 중장년 여성들은 눈치챘을 것이다. 브래지어를 했는지 안 했는지, 속치마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검사하는 장면이다. 수첩에 적힌 학생들은 반성문을 쓴다든지, 운동장에서 토끼뜀을 뛴다든지, 교정 청소를 한다든지 벌을 받았을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니, 가정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거들을 입어야 한다고.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 엉덩이가 나무처럼 딱딱하면 그래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때는 성추행이라는 언어가 없었으니. 힙업도 거들을 입어야 하는 이유였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른가. 단적으로 얼마 전 A여고에서 복장 검사를 했다는 보도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오마이뉴스,
"의자 위로 올라가라더니 치마 들쳐"... A여고의 교복검사, 21.07.16 발행).
A여고에서 일어난 일이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면, 보통 요즈음 젊은 여성들은 어떤 모양으로 코르셋을 경험할까. 다이어트, 화장, 헤어스타일, 패션, 아니면 성형...?
어쨌든 브라와 거들이 그렇게 나의 몸의 일부가 되어 40년 동안 붙어다녔는데... 그런만큼 그것을 벗어버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들을 벗는 데도 친구 Y의 도움이 필요했다.
"집에 있을 때도 거들을 입어?"
"응!"
"안 불편해?"
"응! 습관이 되어서 괜찮아. 오히려 안 입는 게 불편한 걸."
"코르셋을 입으면 혈액 순환이 안되어 몸에 좋지 않다고 하던데."
" ... "
몇 번인가 이런 이야기가 오가며, 거들을 입지 않게 된 것도 올여름인데... 얼마 전 코로나 백신 접종하러 나갈 때, 거들과 브라를 입고 있는 내가 있었다. 강산이 네번 바뀌는 동안 몸에 밴 습관을 한 순간에 버리는 건, 역시 무리였나 보다.
그런데 대략 한 달의 탈코르셋 효과는 분명했다. 그 긴 세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고작 몇시간 입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 답답하고 따갑던지.
탈코르셋, 이렇게 어려운 게 단지 습관 때문일까
한 브런치 작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밖에 나갈 때도 노브라로 나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남의 시선이 자꾸 신경쓰이더란다. 가슴이 도드라져보일까봐 계속 어깨를 움츠리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그 글에 달린 대부분의 댓글은 '그렇게 신경 쓰이면 입고 다니라'는 거였다. 그건 개인의 선택이지, 다른 사람은 관심도 없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코르셋을 내면화·습관화하는 과정도 '자발적 복종'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자발적 복종'이라는 말에는 이런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새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편하다. 거기에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숨어있다. 그 억압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용기가 필요하다. 저항해야 한다.
그 브런치 작가의 글에서 나는 용기와 저항 정신을 읽었다. 탈브라를 하면 어떤 면에서는 좀 불편한데, 왜 그렇게 했을까. 그녀는 코르셋 속에 갇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방시키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무릅쓰고 용기를 냈던 것이고, 욕먹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글을 발행했던 것이리라.
탈코르셋, 개인의 습관만 고치면 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다층적으로 얽혀있는 복잡한 문제다. '여성다움'과 '아름다움'이라는 카테고리로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시선에 저항할 때, 비로소 탈코르셋이 가능하다. 탈코르셋 이후는... 개성미와 건강미가 넘치는 찐 자유인!
그나저나 언제까지 나의 탈코르셋이 지속될 수 있을까. 외출이 잦아지고, 옷이 얇아지는 계절이 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