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2교시 국어 시간. 아이들은 책을 읽고 책에서 좋았던 부분을 400자 원고지에 필사한다. 책장 넘기는 소리, 연필로 글씨 쓰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그 소리 사이로 높고 청량한 음이 들려온다. 되지빠귀의 노랫소리인 듯하다.
몇몇 아이들은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새를 찾아본다. 바람이 분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처럼 들린다. 한 아이가 책을 읽다 곧게 뻗은 참나무를 올려다보고는 말한다.
"선생님. 구름이 움직여요."
우리는 다 같이 참나무 우듬지 사이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본다.
숲에서 아이들은 책을 그냥 읽지 않는다. 책에 새소리, 바람 소리, 숲의 풍경을 담아 함께 읽는다.
일주일에 한 번, 교실을 바꾸자 일어난 변화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반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숲에 갔다. 학기 초부터 가기 시작해 벌써 숲에서 두 계절을 넘게 보았다.
도시에 있지만 숲세권인 우리 학교는 교문에서 숲까지 가는 데 삼 분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숲이 가깝다. 아무리 숲이 코앞이라고 해도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선뜻 아이들과 매주 숲에 갈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가장 힘든 사람은 아마도 아이들이 아닐까 싶다. 뛰노는 것은 아이들의 사명이기도 한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학교에 와서도 아이들은 스무 명이 훌쩍 넘어 꽉 찬 교실에서 종일 마스크를 쓴 채 수업을 받았다. 어른인 나도 갑갑한데 아이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
숲에 갔던 첫날, 산책을 마치고 교실로 들어가는데 우리반 아이가 불쑥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이는 내가 뭘 물어보면 늘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무뚝뚝한 남자아이였다.
"선생님, 2교시는 천국이었어요."
아이는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이며 씨익 웃었다.
아이의 웃는 얼굴이 너무 해맑아 나는 천국이었다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과 매주 숲에 가겠다는 약속은 꼭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유튜브를 좋아하는 요즘 아이들이 혹시 숲을 따분하고 지루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조금 미심쩍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과 산에 갔던 내 기억을 떠올려봐도 온통 나무뿐인 산이 그리 재밌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우리반 아이들은 숲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아이들이 평소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선생님, 숲에 언제 가요?'였을 정도다.
아이들이 숲을 이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친구들, 선생님과 함께 여럿이 어울려 가는 숲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또한 건물 속 교실을 잠시 벗어나는 데서 오는 해방감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교실에서보다 숲에서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웃었다.
스스로 책읽고 연주하는 아이들
나는 아이들과 숲에 갈 때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숲에 갔으니 아이들에게 다양한 식물의 이름을 가르쳐주고, 숲을 활용해 전문적인 생태 수업을 해봐야겠다는 계획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숲에 가는 게 하나의 부담스러운 일거리가 되어 꾸준히 하기 힘들 것 같았다.
나는 교실에서 하던 수업을 장소만 바꾸어 숲에서 했다. 우리는 숲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학급 회의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했다. 그리고 숲길을 걸었다. 고불고불 숲길을 걷다 고사리를 보고, 뱀딸기를 보고, 아까시나무를 봤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어떤 것을 하든 숲이라는 공간에서 하면 특별해졌다. 그중 아이들은 '숲과 책의 만남', '숲과 음악의 만남'을 소중히 여겼다.
우리는 휴대용 방석 하나와 책 한 권씩을 들고 가서 '숲속독서'를 했다. 아이들은 집, 교실, 도서관이 아닌 숲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에 신나 했다. 책을 읽는 공간만 바꾸었을 뿐인데 독서가 즐거운 일이 됐다.
숲에서 책을 읽으면 자리도 좀 불편하고, 벌레가 날아와 귀찮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숲속독서에는 그것을 기꺼이 참을 수 있을 만큼의 낭만이 있었다. 숲이 주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에서 책을 보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온 기분이 났다. 숲에서 읽은 책은 책상 앞에서 읽은 책과 분명히 달랐다.
"책 속에서 햇빛이 반짝거려요."
아이들은 숲에서 책을 펼치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일렁이는 게 예쁘다며 좋아했다. 그렇게 읽은 책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아이들의 열한 살 때 독서가 이 장면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하루는 아이들과 음악 시간에 1인 1악기 활동으로 배우고 있는 칼림바를 들고 숲에 갔다(칼림바는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철판을 튕겨 멜로디를 내는 악기로, 크기는 손바닥만 하다).
그날은 아이들이 그동안 연습했던 애니메이션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곡 '언제나 몇 번이라도>'를 검사받는 날이었다. 나는 굽이진 오솔길 가운데 미리 서 있고 아이들에게 한 사람씩 오솔길을 따라 들어와 연주하도록 했다.
숲에서 아이들 연주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한 명 한 명의 연주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교실에서 듣던 연주와는 전혀 달랐다. 숲에 울려 퍼지는 맑고 청아한 소리에 숲속 요정들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이들이 연주하면 칼림바 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새소리, 바람 소리 등 숲의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연주를 듣고 있으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다. 음악이 교과가 아닌 음악 그 자체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아이들 또한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했다. 아이들은 이날 이후로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칼림바를 꺼내 연습하더니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선생님, 우리 숲에서 음악회 해요."
우리는 조만간 '숲속 작은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
'추억'이라는 교육
숲에 있는 아이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여기야말로 아이들이 꿈꾸는 교실이 아닐까. 숲에서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라고 말하며 호기심과 기쁨의 순간을 함께 나누자고 했고, 숲길을 걸으며 시시콜콜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종알종알 이야기했다. 숲에 갔다가 교실에 오면 아이들은 말개진 얼굴을 하고 별것 아닌 것에도 크게 웃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이야말로 가장 좋은 교육이다.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안전할 것이다."
코로나 시기 숲에 다녔던 우리들의 시간이 아이들 마음에 좋은 추억으로 남길 바란다. 아이들이 커가며 또 다른 힘든 시기를 만났을 때 이 추억이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준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