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두 달 정도 머물다 9월 말 다시 캐나다로 돌아왔다. 캐나다 국경에서 입국 심사를 받는 중이었다. 심사관이 두 달 동안 한국에서 지내고 온 날 보더니 스몰토크를 시작한다. "나도 두 달 한국 가고 싶다."
그러다 캐나다에서 일하는 사람이 왜 두 달 동안 한국에 머물렀는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일할 수 있는 비자를 가지고 있지만, 고용 계약 없이 들어온 거 아니냐고 물어보는데 긴장이 됐다. 대답 잘못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을까 봐 그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봤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는 동안 옆 부스에서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한국 분이 한국에서 가지고 온 김치가 문제가 됐다. 그녀는 "그러니까 김치는 말이에요, 한국 전통 염장 음식인데요"라고 설명했다. 국경에서는 농수산물에 혹시라도 바이러스가 있을까 봐 매번 깐깐하게 검사한다. 이번에도 그런 것 같았다.
해외 생활을 꽤 한 나도 한국에 다녀오면 꼭 챙기는 게 김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치를 가져오지 않았다. 해외에서 팬데믹이라는 끔찍한 시간을 버티는 동안 김치를 담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산 굵은 소금을 사재기 하다
2020년 봄,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었다. 국가 봉쇄가 시작되고, 마트의 매대들이 텅텅 비었다. 아시아 마켓에 갔더니 고추장이 몇 주째 동이 나 있었다. 그 많던 쌀이 동이 난 걸 보니 불안해서 나도 뭔가를 사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내가 사재기를 한 건 다름 아닌 매대에 딱 하나 남은 굵은 소금이었다. 한국인 친구가, 여러 종류의 소금으로 배추를 절여봤는데 한국산 굵은 소금이 제일 잘 절여진다고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그렇게 나는 필요도 없는 굵은 소금을 덜컥 사버렸다가 얼떨결에 김치를 담그게 되었다.
김치 담그는 게 어렵게 느껴졌던 건,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과정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수학 선생님은 소금 농도 맞추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며 본인 자랑을 했다. 수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소금 농도를 잘 맞춰 끝내주게 배추를 절인다는 거였다.
결론은 괜히 긴장했다는 거다. 몇 십 년 만에 선생님께 속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 역시 아주 정밀한 실험을 하는 지구화학 연구자라서 그런지 '짜다 혹은 싱겁다' 정도의 오차 범위를 갖는 배추 절이기 과정은 상대적으로 너무 쉬웠다.
김치 만드는 법은 유튜브 '백종원의 요리 비책'을 참고했다. 막김치 스타일로 담갔다. 배추 반 포기를 작게 썰고 소금 한 움큼을 집어넣었다. 그다음 소금물을 부어주었다. '아우 짜' 할 정도로 절이면 된다길래 소금을 막 뿌렸다. 이 정도면 너무 심하게 많이 넣는 게 아닐까 고민되는 순간 그가 말했다. "짜면 물에 담그면 돼요."
그다음 밀가루 풀에다 고춧가루, 간 마늘, 생강, 쪽파를 넣고 섞어 주었다. 틈틈이 맛을 보는데 어느 순간 엄마표 김치 양념장 맛이 났다. 그다음 나는 양념과 절인 배추들을 섞어서 버무렸다. 백종원 선생의 레시피를 보며 실패의 두려움을 없애고 엄마표 김치의 기억으로 요리를 마무리했다. 젓갈도 못 넣었지만 확실히 파는 김치보다 맛있었다.
김치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마음 둘 친구가 생겼다
나는 작년 9월 캐나다 에드먼턴에 직장을 구해 프랑스에서 넘어왔다. 내가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 코로나 상황이 좋지 않아, 많은 것들이 제한되었다. 재택근무를 했고, 친구 사귈 기회가 없는 나는 집에서 고립되기 시작했다.
나의 유일한 친구는 캐나다인 룸메이트였다. 그녀는 에드먼턴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숍의 바리스타였다. 그 친구 덕분에 매일 맛있는 커피를 얻어 마셨다. 뭔가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녀처럼 육류를 먹지 않는 페스코 베지테리언들이 김치를 좋아했던 게 기억이 나, 김치를 만들어주었다. 젓갈과 마늘 때문에 냄새가 날 수 있다고 했더니 괜찮다며 오히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피시 소스들을 보여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이 살다 보니 공통점이 없어 그녀를 마주치면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매번 눈만 깜박거렸는데 김치 하나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김치에 중독 되었다. 김치가 떨어지면 김치 떨어졌다고 언제 담그냐 물어보기도 하고, 자기가 한인 마트에 가서 김치를 사 와 먹기도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라면에 김치를 먹거나 김치를 볶아 김치 파스타를 먹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녀에게 김치를 선물한 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고립된 상황이 힘들어 친구들이 있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가도, 같이 사는 룸메이트 덕분에 다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그게 벌써 일 년 전이다. 그때가 자꾸 생각나 김치를 담갔다. 그런데 이번 김치는 배추가 덜 절여졌는지 자꾸만 물이 생긴다. 망했다. 그래도 잘 익으면 김치전 만들어 먹기는 딱일 것 같다. 룸메이트와 김치전을 해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