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3명이 모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주민 참여의 문턱을 낮춘 마을공동체 지원정책이 내년이면 10년을 맞는다. 뜻이 맞는 주민들이 지역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 해결해 가며, 조금 더 행복해진 이야기들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변화. 그 10년의 이야기를 몇 차례에 나눠 싣는다.[편집자말] |
서울시는 2017년부터 기존의 주민자치위원회를 주민자치회로 전환하는 시범사업에 착수했다. 주민자치회는 2012년부터 시작된 마을공동체사업과 2015년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찾동) 사업에서 진행한 마을계획 만들기의 경험을 토대로 지역 주민 스스로 지역의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해가는 실험이다.
아직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지만, 주민자치회는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위원을 선발한다. 예전의 주민자치위원회는 동장이 지역에서 일해 줄 사람을 위원으로 선임했다면, 주민자치회 위원은 일정 시간 주민자치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한다. 그래서 전보다는 더 다채로운 주민들이 주민자치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행정 과정에 참여하는 경험이 낯설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서울시는 주민자치회를 지원하는 동자치지원관을 두고 있다. 나는 올해 처음 주민자치회로 전환한 서울 한 자치구의 동자치지원관으로 일하고 있다. 새로 주민자치위원이 된 주민들도 낯설어 했지만, 나도 낯설었다. 모든 것이 처음인 새로운 도전. '아, 이 일을 괜히 맡았나?' 싶은 두려움이 설렘을 조금씩 압도하던 순간, 한 줄기 동아줄을 만났다.
두려움 속에 손 내민 주민센터 공무원
주민자치는 주민 스스로 지역의 여러 일을 고민하고 결정하는 일이라지만, 행정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주민자치 활동은 민관협력, 그중에서도 담당 공무원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성패를 좌우한다.
흔히 공무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기 일만 하고 그 외의 일은 나 몰라라 하는 전형적인 '관료주의'의 모습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마음 졸이고 있을 때, 우리 동자치담당 공무원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여기에 홍보 현수막을 걸면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니, 아니, 거기보다 이쪽에 설치하면 주민들이 더 잘 볼 수 있어요. 그것보다 일단 홍보 문구를 잘 잡아야 할 것 같아요. 뭐라고 할까요? 먼저 우리 주민센터 직원들에게 아이디어를 물어 볼게요!"
이런 공무원이 있나. 서울형 주민자치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평범한 주민들의 참여라면, 우선 홍보부터 해야 했다. 그냥 '주민자치회 위원을 모집합니다' 정도로 문구를 고민하고 만났던 동자치담당 공무원은 나보다 열정이 넘쳤다. '혹시 홍보 플래카드를 잘 걸면 동장님이 인센티브를 주나?' 싶을 정도로 작은 사항 하나까지 세밀하게 신경 쓰는 모습에서 '전형적인 공무원'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깨졌다.
처음 동자치지원관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최대한 담당 공무원을 괴롭혀서라도 일을 잘 처리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런데 이 공무원은 오히려 날 괴롭혔다.
"주민자치회에 대해 쉽게 설명한 자료가 있으면 좀 보내주세요."
"제가 이런 질문을 받았는데 어떻게 답변하면 좋을까요?"
"주민자치 매뉴얼에서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설명을 좀 해주실래요?"
내가 일하는 날이건 일하지 않는 날이건 동자치담당 공무원은 수시로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의견을 제시했다. 민간 지원관의 체면이 있지. 그 공무원 덕분에 나는 우주 최강의 성실한 지원관으로 막 달려가고 있는(정확히는 떠밀려 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설레는 주민총회, 감독 자임한 공무원
정점은 주민총회 준비였다. 주민총회는 주민자치회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누구나 참여해 의제를 토론하고 중요한 사항을 결정한다. 그래서 주민자치회의 성패는 주민총회의 성사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온라인 총회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AI가 바둑도 두고 기사도 쓰는 세상이라지만, 아직은 낯선 비대면!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겨우 화상회의 시스템은 익혔지만, 여전히 온라인을 낯설어 하는 주민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막막한 게 사실이었다. 기획회의를 하자, 주민들은 아이디어를 마구마구 쏟아 냈다.
"우리도 마을 이야기를 영상으로 제작해서 홍보하면 어때요?"
"거, 그냥 뻔한 거 말고, 딱 사람들이 보고 눈길을 확 끌고 기억에 남고 그런 영상을 만들죠!"
"요새는 핸드폰으로 영화도 찍고 그런다던데 스펙터클하면서도 흥미진진하고 엄청 재미있으면서 감동적인 홍보 영상을 만들죠!"
말은 쉽다. 꿈도 크다. 홍보 영상을 만들기로 했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영상을 찍을 장비도, 그걸 편집할 수 있는 장비와 기술도 없었다. 입으로는 <기생충>을 몇 번을 찍고도 남을 이야기가 나왔지만, 영상 홍보물이란 게 상상력만으로 툭 나오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때 어디선가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자치담당 공무원이었다. 그는 자치회관 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장비가 있다며 그걸 활용하자고 했고, 자기가 감독을 맡아 보겠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상 제작에 관해 우리처럼 별다른 지식이 없었던 그는 따로 영상제작 프로그램까지 공부하면서 촬영을 준비했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는 신박한 홍보 영상을 무리 없이 만들고 성황리에 주민총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하는 민관협력
다양한 주민자치 프로그램이 확산하면서 민관협력, 협치의 중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민간과 행정이 서로 잘 협력하고 성과를 내기보다 갈등과 내홍이 심각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대부분 이런 갈등의 원인은 각자 해야 할 일만 중요하게 생각할 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우리 동은 동자치담당 공무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아졌다. 우리는 주민자치회 간사님, 동자치지원관인 나, 동자치담당 공무원 셋을 '주민자치 어벤져스'라 불러달라고 떠들고 다닌다. 그만큼 동네의 자치를 함께 책임진다는 동료 의식이 강하다. 1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어벤져스' 덕분에 처음의 두려움은 비에 눈 씻긴 듯 사라졌다.
협치와 민관협력에 대한 많은 글이 나오고 있지만 핵심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거기에서 지역의 변화와 자치는 시작된다. 우리 동네부터 그걸 증명하고 제대로 된 주민자치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 동네에는 '어벤져스'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