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서욱 국방부장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속 군대 모습을 두고 "지금의 병영 현실하고 좀 다른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2020년 이후 선고된 군 구타·가혹행위 판결문 183건(민간법원 134건, 군사법원 49건)을 분석했습니다. 판결문에 담긴 군 구타·가혹행위의 심각성과 근절되지 않는 구조적인 이유 등을 9차례에 걸쳐 보도합니다. 이 기사는 그 네 번째입니다. [편집자말] |
폭력의 얼굴은 특별하지 않다. 누구나 폭력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폭력이 무서운 까닭은 가해자를 더욱 잔혹한 가해자로 만드는 것을 넘어, 평범한 이를 가해자로 만들고, 심지어 피해자까지 가해자로 만드는 그 속성 때문이다.
폭력은 폐쇄적인 곳에서 더욱 활개를 친다. '감출 수 있다' 혹은 '알리기 어렵다'는 작은 낌새만으로도 폭력의 가능성은 쑥쑥 자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군대는 폭력의 자양분이 넘치는 최적의 공간이다. 그렇게 '군폭'은 은폐되고, 전염되고, 대물림되어 좀비처럼 살아남는다.
그래서 '요즘 군대는 그렇지 않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숫자는 줄었을지 몰라도 구조엔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선임이 되면 절대 안 그럴 거야"란 다짐은 번번이 나가떨어진다. 2005년 이승영(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이 그랬고, 2021년 조석봉(드라마 <D.P.>)도 그랬다.
이 기사에서 소개할 판결문 속 군인들도 마찬가지다. <오마이뉴스>가 2020년 이후 선고된 군 구타·가혹행위 판결문 183건(민간법원 134건, 군사법원 49건)을 통해, 군폭의 속성을 들여다봤다.
판결문 곳곳, 반복되는 특징
피고인 역시 피해자와 함께 선임병으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하는 등 병영문화 악습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 해병제2사단 보통군사법원, 2021년 5월 26일 선고
판결문 속 이 한 마디에 주목했다. 가해자인 피고인을 두둔하려는 게 아니다. 그가 어떻게 가해자가 됐는지 알아야 문제 해결의 방법도 찾을 수 있다. 이 피고인은 피해자 일병 5명을 상대로 약 세 달 반 동안 34차례에 걸쳐 250회 가량 폭행을 저질렀다. 또 잠을 재우지 않거나, PX까지 왕복 전력질주를 시키고, 장시간 기마자세를 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 판결문 속 범죄일람표엔 반복되는 사례가 있다. 피고인보다 더 고참인 선임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는 것이다.
▲ 선임이 시켜 A 일병이 자신을 때렸다는 이유로 우측 손으로 A 일병의 멱살을 잡고 좌측 주먹으로 가슴을 4회 폭행 - 2020년 7월 14일 과업 중, 생활반
▲ 선임이 시켜 B 일병이 "○○아"라고 자신의 이름을 (반말로) 불렀다는 이유로 양쪽 주먹으로 B 일병의 우측 상박 부위를 10회 폭행 - 7월 8일 오후 3시경, 생활반
▲ C 일병의 실수 때문에 (자신이) 선임에게 욕을 먹었다는 이유로 좌측 손바닥으로 C 일병의 우측 뺨 8회, 좌측 주먹으로 가슴 3회 폭행 - 5월 15일 오후 4시경, 분리수거장
▲ C 일병이 위병소 근무 중 실수한 일로 (자신이) 선임에게 지적을 받았다며 C 일병의 좌측 주먹으로 가슴 2회 폭행 - 6월 24일 오전 11시 10분경, 분리수거장
위 사례에는 최고참들이 후임을 시켜 중간고참인 피고인을 때리게 하거나 반말을 하도록 지시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또 실수를 한 후임 대신 피고인을 질책해 '내리갈굼'이 이뤄지도록 하는 최고참들의 행태도 언급돼 있다. '선임'이 등장하는 사례는 더 있다.
▲ D 일병이 선임에게 실수했다며 양손으로 D 일병의 양쪽뺨 20회, 양쪽 주먹으로 가슴 10회 폭행하고, 오른손으로 목을 10초가량 조름 - 5월 18일 오전 8시경, 오침자실
▲ 선임들 앞에서 A 일병이 한숨을 쉬었다는 이유로 좌측 손바닥으로 A 일병의 우측 뺨 3회, 좌측 주먹으로 가슴 3회·어깨 2회·오른손등 4회, 좌측 맨발바닥으로 복부 3회 폭행 - 7월 4일 오전 0시경, 생활반
▲ 선임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D 일병이 머리카락을 12mm로 잘랐다는 이유로 양쪽 주먹으로 D 일병의 가슴 10회, 명치 1회, 왼발로 허벅지 2회 폭행 - 7월 10일 오후 9시 50분경, 생활반
▲ 지휘관 시간 종료 후 의자 정리 중 C 일병이 고참들의 의자를 대신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좌측 손바닥으로 C 일병의 우측 뺨 2회 폭행 - 3월 31일 오전 8시 45분경, 분리수거장
▲ D 일병이 전역 예정인 선임에게 말을 편하게 해도 되냐는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우측 손으로 D 일병의 목을 5초 조르고 좌측 손으로 목을 10회 꼬집었으며 양쪽 주먹으로 옆구리를 10회, 주먹으로 등을 20회 폭행 - 6월 2일 오후 5시경, ◯◯◯ 훈련장
이렇듯 피고인은 스스로 선임들의 눈치를 보며 중간고참으로서의 과업을 '충실히'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아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후임들 사이에도 폭력의 씨앗을 심었다.
▲ C 일병이 보다 더 후임인 A 일병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좌측 주먹으로 C 일병의 가슴을 3회 폭행 - 5월 중순 오후 9시 15분경, 생활반
"폭력의 고리 끊으려면 '이상한 사람' 되는 곳"
이 사례 외에도 수많은 판결문에서 비슷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고인(최고참)은 2019년 11월 말경 낙엽 청소를 하던 중 후임인 E가 더 후임인 F에게 "절단기로 젖꼭지를 잘라버린다"라고 말을 하자, E에게 "너 진짜 안 하면 뒤진다"라고 지시했다. E가 철제 절단기(44cm)를 들었다 내려놓으면서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망설이자, 피고인은 "안 하면 네가 뒤지는 거라 했다"라고 말하며 E에게 재차 지시했다. F를 상대로 해당 행위의 시늉을 하던 E는 F가 아프다고 하자 절단기를 내려놨다. 이에 피고인은 "안 잘렸는데, 제대로 안 하지?"라고 말하며 거듭 E에게 지시했다. E는 재차 절단기 날을 F의 우측 젖꼭지 부위에 대고 자르는 시늉을 하다가 F가 아파하자 절단기를 내려놓았다. - 인천지법 제13형사부, 2020년 8월 14일 선고
피고인(중간고참)은 자신이 선임병에게 질책을 당했다는 이유로 2020년 5월 4일 11시 30분경 생활반에서 후임인 G·H·I 일병에게 4분 간 '머리박아'를 시켰다. 또 우측 군홧발로 G 일병의 가슴을 4회·좌측 정강이를 5회, 우측 손바닥으로 좌측뺨을 4회 때리고 G 일병이 머리박아를 하다가 쓰러졌다는 이유로 우측 군홧발로 머리를 2회 때려 폭행했다. 또 6월 27일 오전 0시 30분경 생활반에선 G 일병이 실수를 해 TV가 꺼졌다는 이유로 I·J·K 일병에게 10분간 머리박아를, L 상병에게 2분 간 머리박아를 시켰다. - 서울북부지법 형사5단독, 2021년 4월 22일 선고
피고인(최고참)은 2019년 6월 19일 오후 9시경, 생활관에서 피해자(중간고참)에게 후임병들을 상대로 욕을 하라고 시켰음에도 피해자가 이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등을 주먹으로 2회 때려 폭행했다. - 대전지법 천안지원 제1형사부, 2020년 5월 20일 선고
무엇이 문제일까.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그래도 된다는 인식이 오랜 세월 동안 전승·축적돼 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사회에선 남이 내 말을 잘 듣게 하려면 설득이란 방법을 사용한다. 사실 말을 잘 듣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두들겨 패는 것인데 사회에선 그게 범죄로 인식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군대는 그렇지 않다. 상식과 도덕률을 벗겨야 할 '사회의 때'로 여길 뿐만 아니라, 너무도 오랜 기간 동안 두들겨 패고 괴롭혀도 된다는 생각을 가져왔던 조직이다. 대부분이 괴로운 후임 시절을 지나고 나면 '군대는 원래 그렇게 운영돼'라는 집단적 공감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선 그 고리를 끊으려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이어 김 국장은 "여전히 우리 군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터질 것이다"라며 "하지만 국방부는 현상적인 측면만 보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라고 지적했다.
군에서 인권 관련 업무를 수행하다 최근 전역한 장교 출신 A씨는 "계급은 공적 영역에서만 작동한다는 개념이 교육되고 자리 잡혀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대부분 20대 초반의 나이에 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해본 경험이 없거나 이와 관련된 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군에 입대한다"라며 "그런데 입대 후 몇 개월 만에 이들에게 권력이 쥐어진다. 초임병 시절 갈굼을 당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할 틈도 없이 '계급이 왕'인 문화를 습득하기 때문에 내리갈굼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군은 유사시를 대비한 철저한 계급 조직이지만, 이 계급은 공적인 영역에서만 작동해야 한다. 사적인 영역까지 계급이 침범해선 안 된다. 쉽게 말해 업무 외적으론 홍길동 병장과 김철수 일병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철저히 공사를 구분하고 사적인 영역에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계급을 지워야 조금 더 나은 병영문화를 만들 수 있다. 아마 이러한 이야길 하면 많은 이들이 '군기가 빠진다'고 할 텐데, 병영생활의 기본을 지키지 않으면 선임이든 후임이든 규정에 따라 책임을 지도록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