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서욱 국방부장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속 군대 모습을 두고 "지금의 병영 현실하고 좀 다른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2020년 이후 선고된 군 구타·가혹행위 판결문 183건(민간법원 134건, 군사법원 49건)을 분석했습니다. 판결문에 담긴 군 구타·가혹행위의 심각성과 근절되지 않는 구조적인 이유 등을 일곱 차례에 걸쳐 보도합니다. 이 기사는 그 마지막 일곱 번째입니다. [편집자말] |
드라마 <D.P.>의 '군폭 가해자' 황장수 병장. 그의 물리적 폭력과 강제 추행 등은 후임병을 끝내 탈영에 이르게 만들었다.
"넌 전역한 걸 다행으로 알아."
탈영 후 복수심에 자신을 찾아온 피해자를 두고 오히려 "얘 감빵가냐"며 조롱하는 황 병장에게 D.P.(탈영병 체포조) 한호열 상병(구교환 분)이 던진 대사다. 무엇이 다행이라는 걸까.
<오마이뉴스>가 2020년 이후 선고된 구타·가혹행위 판결문 183건(민간법원 134건, 군사법원 49건)을 수집해 분석해 본 결과, 실형이 선고된 사건은 총 10건에 불과했다(약 5.4%). <D.P.> 종반부, 눈물로 참회한 황장수 병장은 법의 심판을 제대로 받았을까. '황장수 닮은꼴' 가해자들의 판결은 그렇지 못했다.
피해자 용서 안했는데, '동료 병사 탄원'이 유리한 정상으로
"와 이 새끼 얼굴도 폐급(군대 부적응자를 모욕적으로 가리키는 비속어)인데 인생도 폐급이네."
여기 또 다른 황 병장이 있다. A병장은 2019년 1월부터 전역하는 날까지 피해 후임을 "날짜와 시간을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시로" 모욕하고 폭행했다. 피해자가 대학을 재수했다는 이유로 공연히 '폐급'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판결문에서 언급한 폭력의 이유는 <D.P.> 속 사례와 닮았다. "여자친구와 다퉈 기분이 좋지 않다." "피해자가 선임병들의 기수와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폭행은 숫자로도 기록됐다. 약 두 달 간 생활반에서 십여 차례, 합계 100여 회였다. 피해자는 "날짜와 시간을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시로 때렸다"고 진술했다.
A병장은 어떻게 됐을까. 2020년 종결된 대구지법 1심과 대구고법 항소심의 결론은 같았다.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된 요소는 폭행 가해 병사의 "성실한 군 복무"였다. "다수의 군 생활 동료인들의 탄원"도 언급됐다. 다만, 정작 피해 당사자인 후임은 항소심에 이르기까지 선임을 용서하지 못했다.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피해자가 "처벌을 지금도 원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듯 군 가혹행위 판결 속 '양형 이유'에선 가해자의 '군 생활'이 참작되는 사례가 더러 있었다. 판결에서조차 피해 사실에 대한 반성보단 군 조직의 특수성이 양형에 반영되는 모습이었다.
인천 옹진군 연평면 해병대 연평부대에서 2019년 벌어진 폭행 사건 또한 마찬가지다. 취사병이었던 가해자는 후임에게 길이 32cm, 날 20cm의 칼을 겨누며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뺨을 때리거나, 물을 튀기며 설거지했다는 이유로 물이 고인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자세를 유지하도록 했다. 2020년 2월 성남지원 재판부의 결론은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1년.
재판부는 양형 이유로 연평부대가 최전선 부대인 점을 거론했다. "2010년 북한 포격 도발 시 전사자가 발생한 부대 중 한 곳"이기 때문에 "병사들 사이에서 군기 확립을 명분으로 가혹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이 있었다"는 해석이다. "범행의 죄책을 전적으로 피고인 개인의 악성 발현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도 했다.
폭력의 이유를 과한 '지휘 방식'으로 포장한 판례도 있었다. 경북 포항, 제1해병사단제1포병연대에서 발생한 군폭 사건이다. 가해 병사는 2018년 11월과 2019년 2월 등 취침실에서 후임 병사들을 수시로 폭행했다. "얼굴 보니 짜증난다"는 이유로 배를 밟기도 하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때리고 싶다"며 주먹으로 팔을 가격했다.
이유 없는 폭력의 결론은 벌금 700만 원. 재판부는 가해자가 "후임병들의 일 처리가 미숙하다고 판단해 과도한 훈계의 목적을 가진 채 범행을 한 것으로 보여 참작할 사정이 있다"고 봤다. 이 재판에서도 가해 병사 지인들의 '선처 탄원'이 유리한 정상으로 작동했다.
황당한 감형 사유들
피해자보다 가해자에 초점을 맞춘 양형 이유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아직 20대" "대학생인 점" 등 가해자의 나이를 언급한 사례도 있었다.
특히 2020년 6월 광주지법 순천지원의 판결을 보면, 후임을 상대로 1년 가까이 강제추행을 저지른 선임에게 선고유예를 선고하며 "군복무간 발생하는 문제를 무조건 개인 탓으로 돌리기 어렵다"고 했다. 앞서 불리한 정상에서 "피고인과 피해자가 같은 공간에서 계속 생활해야하는 경우 매우 큰 정신적 고통을 줄 수 있다"고 짚은 대목과 모순되는 지점이다.
특히 재판부는 무려 12년 전 가해자의 봉사기록을 언급, "2008년부터 2020년까지 총 184회에 걸쳐 798시간의 봉사활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 가해자는 후임병을 상대로 2018년 12월부터 2019년 8월까지 화장실과 생활관 침상 등에서 반복적으로 추행을 저지른 바 있다.
또 다른 서울남부지법 재판부는 지난 6월 14일 총 5명의 피해자에게 10여 차례 강제 추행을 저지른 가해자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처분을 하면서, "피고인이 피해자들에 대한 나쁜 감정이나 성적 욕망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군 사법 전문가들은 군폭 사건에 대한 법원의 가해자 중심의 시각 자체가 폭력을 대물림하는 근본 원인이라고 짚었다. 송기춘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장은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군이라는 상황을 (법원이) 많이 고려하는데, 철저하게 범죄를 처벌하는 노력 없이는 (폭력이) 끊어지기 어렵다"면서 "가해 행위에 대해선 책임을 엄격히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입법을 통해 국회와 국방부가 고등군사법원을 폐지하고 군인 사망 사건과 성폭력 사건을 민간 법원에 이관하는 등 군 사법 개혁을 추진 중이지만, 실제 군사 범죄를 다루는 사법부의 인식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실질적인 개선은 힘들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형남 군 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군대라서' 통용되는 사법 잣대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김 사무국장은 "무조건 징역 10년, 20년 때리라는 말이 아니다"라면서 "(법원은 군폭 사건에서) 선임 지위를 후임에게 위력으로 이용한 경우, 위력행사라는 가중 요인이 적용 되어야 하는데, 감경 사유를 더 크게 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법원이 '군 범죄는 실형 없이 끝난다'는 사인을 줘선 안 된다는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