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
어느 날 아빠가 출가하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이 사실을 카톡으로 '통보' 받았다. 이 사달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렵사리 세 가족이 모인 날, 뭐라도 말 좀 해보라는 다그침에도 아빠는 말이 없었다. 엄마는 그냥 떨어져 버리겠다며 베란다로 뛰쳐나갔고, 다행히 이 시도는 실패에 그쳤다.
그렇게 가족이 해체됐다. 엄마는 남편을, 딸은 아빠를 잃었다. "진정으로 한부모가정이 됐"지만, 어쨌든 한 달 소득이 140만 원을 넘는다는 이유로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모녀는 일상을 살아가야 했다. 엄마는 유일한 재산인 차를 팔아 딸의 대학 등록금을 냈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 평생 노동을 하며 가정 경제를 책임지던 엄마가 갑작스레 사고를 당해 몸을 다쳐 결국 일을 그만둬야만 했다. 대학생이던 딸은 알바를 하나둘 늘려가다 결국 공부를 중단했다. 때론 '인간극장'에 나올 법한 구구절절한 비극을 담아 장학금 신청서를 쓰기도 했다.
쉴 틈 없이 일했지만, 여유란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딸은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회사에 취직했지만, 비상계단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정성 들여 점심 도시락을 싸오는 걸 비웃고 불편해 하던 사람들이 있던 그곳을 버티다 버티다 뛰쳐나왔다. 책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쓴 양다솔 작가의 이야기다.
아주 납작하게 요약한 이력만 훑어본다면, 누군가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볼지도 모르겠다. 집은 바람잘 날 없고, 대인관계와 사회생활은 생각만큼 순탄치 않고, 늘 돈이 부족해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삶. 읽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양다솔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매일매일 절박한 삶에도 결코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작가가 유독 긍정적이고 대책 없이 낙관적인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절벽에 서도,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은 양다솔 작가가 일을 그만 두고 백수가 된 뒤, 메일을 통해 연재해온 '격일간 양다솔'과 독립출판물 <간지럼 태우기>에 수록했던 글들을 묶은 에세이집이다.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놓은 그의 글을 읽다보면, 결코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그의 말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글엔 그저 '비극'으로만 요약될 수 없는, 슬프고도 기쁜, 아프고도 행복한, 여유롭지 않지만 충만한 순간들이 촘촘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백수 생활이 기약 없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매일 아침마다 정성스레 보이차를 끓인다.
또 여름엔 직접 기른 봉숭아 꽃잎으로 손톱에 물을 들이며, 근사한 팥빙수 한 그릇을 제 손으로 만들어 먹고, 남은 팥을 이웃에게 나누는 넉넉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때론 당장의 생활비를 아껴 맘에 드는 옷을 사고, 여행을 간다. 이토록 입체적인 인간의 삶을 누가 '가난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까.
... 참 내, 벌써 몇 달째야.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여전히 뭘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안 나네. 나는 생각했지만, 당장 앞에서 팥빙수가 녹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팥빙수. 함께 나눠 먹는 팥빙수. 절벽에서 보이는 풍경은 오늘도 아름답고,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정말 이상하게도, 전혀 가난해지지 않는다. (p.20)
'절벽 앞에 텐트를 친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도 눈 앞의 노을에 감탄할 수 있는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앞서 말했던 것처럼, '긍정의 에너지'에서 이 모든 게 비롯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양다솔 작가는 "글은 슬퍼야 깊이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그보다는, 갈지 자로 오가는 것 같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기록하고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했던 그의 습관이 지금의 단단함을 만든 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양다솔 작가가 타인을 그릴 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세계에선 완벽한 악인이나 선인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고, 미우면서도 정이 가고, 증오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그는 성실히 탐구한다.
특히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에는 아빠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는 분명 한 사람이지만 한 사람 같지 않다. 오랫동안 보험회사 세일즈맨으로 살다가 갑자기 출가가 오랜 꿈이었다며 산 속 절로 들어간 그는 일면 무책임한 가장 같지만, 젊은날엔 상대의 조건이나 배경을 따지지 않고 심지 굳게 결혼을 결심한 청년이었다.
또, 동시에 딸에게 유머 감각이라는 훌륭한 유산을 남겨준 집안의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훌쩍 떠나버린 그가 원망스럽지만, 한편으론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를 응원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와닿는다.
... 내가 어쩌다가 웃긴 사람이 됐나 생각해보니 거기에 아빠가 있었다. (중략) 나는 그가 떠났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지 잘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서서히 놀라고 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에. 그가 좋아하던 특이한 반찬들이 내 입맛에 꼭 맞는 것에. 조용한 밥상이 너무도 어색한 것에. (중략) 나는 내 삶에서 가장 웃긴 사람이 당신이었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깨닫고 그 자리에 주저않아 꺽꺽 울고 말았다. 그 자리는 당신이 떠나고부터 쭉 공석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러 나에게 아주 웃긴 이야기가 생겨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206)
"양다솔을 만나고 온 밤엔 꼭 글을 쓰게 됐다"
양다솔 작가의 오랜 친구인 이슬아 작가는 "양다솔을 만나고 온 밤엔 꼭 글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양다솔과 친구가 아니었다면 결코 쓰지 못했을 문장들이 내 책엔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오랜 글쓰기 동료로서 으레 하는 칭찬이 아닐까 했는데, 책의 마지막 장까지 다 덮고 나니 왜 이슬아 작가가 그를 만나고 온 날엔 꼭 글을 쓰게 됐는지, 양다솔 작가가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할 때 녹음기를 꺼내들었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양다솔 작가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취미로 하는 만큼 탁월한 이야기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실한 생활인이다. 또, 하고 싶은 것과 나의 지향, 욕망을 알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용감한 모험가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이 글을 쓰며 치열하게 나와 타인을 들여다보고 생각을 곱씹으며 살아간다면, 정말 삶이 가난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절벽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누군가가 이 책을 읽는다면, 양다솔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글을 써보았으면 좋겠다. 그 기록만으로도, 삶은 쉽게 가난해지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