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년 사이 MBC 전·현직 아나운서들이 에세이집을 출간하고 있다. 최현정 전 MBC 아나운서도 그중 하나다. 최 전 아나운서는 지난 11월 17일 <유일한, 평범>이라는 첫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가장 반짝인다고 생각했던 20~30대 시절을 지나, 생의 2막을 준비하며 느낀 단상을 느리지만, 꾸준히 일기처럼 담았다.
책 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2일 서울 용산역 안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최현정 전 MBC 아나운서를 만났다. 다음은 최 전 아나운서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유일한, 평범>의 프롤로그를 보니 책에 대한 생각을 오래 하신 거 같던데 막상 출간되어 나오니 어떠세요?
"저는 막연하게 제 인생이 작가로서 새롭게 열릴 거로 상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도 달라진 건 없고 다만 책을 건네주겠다는 핑계로라도 여러 사람에게 다시 연락해 보죠. 제 개인적으로는 코로나 때문에도 그랬고 아이 키우느라 많은 사람하고 교류를 못 하고 지냈었는데 책을 내면서 조금 더 여러 사람하고 다시 연락해보고 안부 인사 건네는 것이 좋았어요."
- 처음 책 받았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제가 2년 넘게 그래도 매달리고 있던 게 이렇게 결과물로 나오니까 큰 숙제 마무리한 기분 홀가분하고 반갑고 이거 내가 쓴 책이 이렇게 손에 잡히는 유형으로 남는다는 게 한편으로는 조금 겁이 나기도 했던 것 같아요."
- 왜 겁이 났을까요?
"제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증거가 돼서 남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나중에 말한 것을 번복하고 싶을 때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생각한 것들이 남아 있는 게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는 이 책을 어떤 눈길로 바라볼까 이런 것도 조금 궁금해지고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 책은 어떻게 출간하게 되었어요?
"사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글을 실제로 써보기도 했는데 한 편 완성하기도 쉽지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유튜브 콘텐츠를 보시고 이런 콘텐츠들을 글로 써서 책으로 묶어보면 어떻겠냐고 한 두세 군데 출판사에서 제안을 받았어요. 그래서 덜컥 계약했어요. 그냥 하고 싶었던 일인데 제가 자발적으로 잘 못 했던 걸 제안해 주시니까 너무 반갑고 고맙더라고요."
- 원래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나요?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은 늘 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작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저는 깜냥이 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 꿈을 무척 깊은 곳에 묻어두고만 있었던 것 같아요."
- '빠르게 잊힌 아나운서'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더라고요. 근데 이름 말하면 알지 않나요?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은 많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걸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도 아니고요. 근데 어쨌든 아쉬움은 있었던 것 같아요. 한켠에 늘 방송을 조금 더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혹은 사람들과 더 많이 소통할 수 있는 그런 기회나 방법이 더 많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아쉬운 마음은 늘 가진 것 같아요."
"모든 것들이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 호칭에 대한 얘기도 있던데 뭐라고 불리는 게 좋으세요?
"가장 정확하게는 그냥 별다른 호칭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최현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가장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어떤 역할을 제가 수행한다고 하면 행사에 사회를 보든 혹은 방송에 출연하든 그럴 때는 그냥 예전처럼 아나운서라고 불리는 게 가장 편하고 저도 좋아요."
- 출산 후 육아하며 세상에 나오기 두려운 부분이 있었던 거 같은데.
"두려웠다기보다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내가 세상 돌아가는 걸 그때그때 다 파악하지 못하고 동떨어져서 지내는 시간 동안 세상이 훨씬 더 빠르게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고 거기 내가 들어가기에 속도를 빨리 높이지 않으면 저기 들어가기가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 세상에 나와보니 어때요?
"제가 생각하는 세상이라는 것도 너무 빨리 돌아간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냥 그 안에도 여러 세상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저의 속도도 세상이 빨리 돌아가는 거에 비해서 너무 느린 것 같다고 느끼지만 느리게 돌아가는 영역도 있더라고요.
이를테면 책이 조금 느린 영역이라면 느린 영역일 수 있고 다 디지털화되는 중에도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니즈도 분명히 있고 그래서 지금은 또 저의 세계를 나름대로 구축해 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 책에 보니 난임 과정부터 출산까지 쓰셨던데 당시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힘들었겠다란 이야기도 많이 하시더라고요. 근데 사실은 너무 힘들지는 않았죠. 물론 호르몬제 맞으면 신체적으로도 반응이 여러 가지 부작용도 있으니까 어려움도 있고 아이를 늦게 가지게 되는 것에 대한 초조한 마음도 조금은 있었지만 그렇게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요즘엔 의학이 워낙 발달해 있기 때문에 계속 시도하고 노력하면 아기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시기가 불행하다거나 너무나 큰 고난이었다거나 이렇게 기억되지는 않아요."
- MBC 170일 파업 이야기도 나오던데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어떠세요?
"제가 회사 그만두던 당시에 진짜 하루 종일 들었던 노래가 '걱정 말아요. 그대'인데 그 노래를 무한 반복해서 들었었어요. 지금도 사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마음 아픈 지점들이 있는데 그냥 지나간 건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죠.
이 글을 뺄까 말까를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요. 너무 철 지난 이야기를 이제 와서 푸는 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에요. 그런데 저의 인생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어떤 분기점이었던 것도 맞아서 관련한 글을 한 편 넣기는 했죠. 지금 돌이켜보면 모든 것들이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세상을 아는 것과 개인의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
- 마지막이 라디오 PD였던데 만약 라디오 PD가 아니었고 방송이 없더라도 아나운서란 직종에 남아있었다면 퇴사했을까요?
"그 질문은 진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만약에 라디오 PD로 발령을 안 받았다면 방송이 잘 주어지지 않아도 아나운서국에 있었을 것 같고요.
어쨌든 저는 아나운서라는 제 직업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저는 그 조직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아나운서국에) 있었을 것 같아요. 근데 어쨌든 직장인으로서 생활은 하루 대부분을 회사에 매여 있어야 되잖아요. 아이 둘을 한꺼번에 낳으면서 그게 가능했을까는 잘 모르겠어요."
- MBC 아나운서들 보면 왠지 가족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왜 그럴까요?
"MBC 아나운서국의 독특한 조직 문화였던 것 같아요. 우리는 아나운서국이지만 아나운서국이라고 표현 안 하고 우리들끼리 그냥 '우리 방'이라고 말하거든요. 정말 그냥 오빠 동생 언니 동생 이런 느낌으로 서로를 대하고 생각하고요. 근데 전 지금도 그래요. 전 사실 거기 안에 구성원이 아닌데도 책 내고선 가장 먼저 책 들고 간 곳이 MBC 아나운서국이었거든요. 여전히 나의 가족으로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런 조직 문화가 장점도 있고 단점도 물론 있겠지만 어쨌든 무척 고유하고 특이한 거기는 하고 저는 거기에서 느껴지는 많은 정서적인 지지를 되게 감사하게 오랫동안 누렸던 것 같아요. 이제 정말 아무 관련이 없잖아요. 근데도 여전히 내 식구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어요."
- 지금도 MBC 아나운서국이 그리우세요?
"네. 그립죠. MBC 아나운서에 무슨 일 있으면 다 제 일 같고 여전히 저는 그냥 퇴사하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냥 가족처럼 늘 연락도 자주 하고 그러니까요."
- 지금은 상담 일하고 있잖아요. 상담 공부는 어떻게 알게 됐어요?
"제가 심리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은 사표를 냈던 것도 계획에 있던 일이 아니었는데 엉겁결에 사표를 내기도 했는데 그전부터 사실은 상담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했거든요.
그런데 대학원을 진학하고 싶어도 회사 다니면서 대학원 다니기에 너무 여의치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계속 미루던 차였는데 사표 냈으니까 남은 게 이거밖에 없다 싶어서 대학원 진학을 바로 알아봤죠."
- 어떤 게 재밌나요?
"저는 착각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이 세상에 정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는 게 직업이다 보니까 제가 정말 세상을 많이 아는 양 좀 착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세상을 아는 것과 개인의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거랑은 또 조금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공감받고 싶어요"
- 아무래도 상담도 물어보고 듣는 거라 아나운서 때 하던 거와 통하는 게 있는 거 같아요.
"저도 그렇게 착각한 것 같아요. 아니에요. 아나운서였던 배경이 상담사가 되는 데 있어서 유리한 지점이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했거든요. 이를테면 사람을 만나고 분위기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내고 인터뷰하고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이런 것은 아주 훈련이 돼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인터뷰 하고 상담에서의 질문과 대답은 정말 아예 다른 영역이더라고요.
어찌 보면 방송용 인터뷰는 재미의 요소를 빠뜨릴 수 없기 때문에 더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혹은 자극적인 얘기가 나오도록 유도하는 질문들을 되게 많이 하게 되거든요. 그거와 아예 다른 각도에서의 접근이 필요해요. 그렇다 보니까 오히려 그렇게 질문하는 건 해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나운서 때에 인터뷰하던 패턴을 다 버리는 데 되게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 아나운서로 10년 살았기 때문에 그걸 버리는 게 어려웠을 거 같아요.
"어려웠어요. 쉽지 않더라고요. 제가 질문하는 패턴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궁금증을 그대로 질문하면 흔히 하던 방송용 인터뷰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가 몸에 배어 있는 질문 패턴을 버리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요."
- 책으로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뭘까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저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공감받고 싶어요. 말하자면 '내가 살아보니 이렇더라고요. 이렇게 사는 게 맞아요. 이렇게 삽시다'라는 식으로 절대 얘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사는 지금 이 모습도 나에게 맞는 답일 수 있지만 이게 모두에게 맞는 답이라는 생각은 안 하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서 '이게 맞으니까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나 '저게 맞으니 저렇게 갑시다'라고 조금이라도 좀 강한 뉘앙스를 담아서 얘기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까 경계했고요. 다만 그냥 '저는 이렇더라고요'라는 말에 '나도 좀 비슷한데'라고 누군가 공감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는 마음이었어요."
-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주세요.
"책을 내봤는데 사람들은 책 안 보더라고요(웃음). 우리나라에 책을 읽는 인구가 정말 작아요. 하지만 책 읽는 인구에 비해서 책은 너무나 많아요. 정말 정말 좋은 책도 그냥 묻히고 사라지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이번에 느꼈거든요. 제 책이 엄청 대단해서가 아니라 어쨌든 나는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 안에 진짜 진짜 진짜 재밌는 이야기들 진짜 진짜 나에게 영감을 주는 이야기들 되게 되게 많은데 그걸 채 모르고 그냥 다 지나가 버린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떻게 하면 책 읽는 독자가 많아질지 저는 그 고민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WBC 복지TV 전북방송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