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
소싯적 피아노 학원을 다녔지만 당시 동네 학원이 그렇듯이 대충 손가락 돌아가면 진도 나가기 바빴다. 학생은 한 번 연습하고는 두세 번 했다고 표기하기 일쑤며, 학부모는 왜 우리 애만 아직도 체르니 100번 치냐고 닦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원 선생님이 학생에게 음표 하나하나 세심하고 꼼꼼하게 가르치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래서 전공이든 아니든 피아노에 진지하게 접근하게 되면 개인 레슨을 받게 된다. 나 역시 피아노에 나름 진심인 편이지만 초등학생 두 딸의 피아노 학원비 지출도 있고, 일단 스스로 악보를 읽고 연습할 정도는 되니 한동안 개인 레슨에 대한 욕망은 억눌렀다.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관련기사 :
브람스와 클라라가 못 이룬 사랑, 내 손으로 이어주련다 http://omn.kr/1vuyq)
이 매력 터지는 곡이 뇌 속 깊숙한 원초적 영역을 건드렸는지, 몇 달 내내 다양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비교 감상하며 계속 붙잡고 연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진감래라고 드디어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지독한 반복 감상으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 익숙해진 내 귀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좋아하는 마음이 클수록 그만큼 더 잘 치고 싶은 욕망도 컸다. 적어도 이 곡에 한해서는 아마추어 방구석 연주자로서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 싶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계에 봉착했다는 판단이 서자 필연적으로 '개인 레슨'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리저리 알아보고 직접 전화를 걸어 문의한 끝에 여의도에 있는 한 피아노 학원을 선택했다. 집에서 더 가까운 곳도 있지만 굳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로 레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피아노일수록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니, 가능한 한 높은 곳을 지향하는 내 입장에서는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로 레슨을 받고 싶었다.
잘 치고 싶다, 잘 치고 싶다
지난 11월 초. 한 달 치 학원비를 결제하면 개인 레슨을 네 번 받을 수 있는데, 이날이 그 첫 레슨이었다. 적지 않은 학원비를 투자했으니 최대한 뽕을 뽑겠다는 일념으로 한 시간 일찍 학원에 도착해서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는 연습실에서 열심히 손을 풀었다. 드디어 인생 첫 피아노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놓인 16번 방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자 선생님이 수많은 사람을 가르친 여유가 담긴 인사를 건넸다.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를 완성도 있게 치고 싶다고 하니, 한번 들려달라고 요청을 한다. 드디어 시작됐구나!! 심호흡하고 다소 긴장된 상태로 첫 음을 누르기 시작했다.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의 생소한 건반 터치감과 볼륨 있는 음향에 다소 당황했지만 이내 적응한 후 나름 몰입해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를 마쳤다.
"이야! 잘 치시는데요? 윗소리도 잘 살리시고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집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했어요."
"음, 그러면 제가 전공생한테 하는 방식으로 레슨할게요."
"헉! 제 실력으로 가능할까요?"
"네. 충분히 가능하세요."
그 뒤로 경험한 일들은 '잘 치시는데요?'가 얼마나 방구석 아마추어에게 국한된 표현이었는지를 절감한 순간들이었다. 나름대로 꽤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했기 때문에 손 볼 곳이 많겠냐 싶었는데,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는 첫 레슨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고치지 않은 구석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일단 건반을 누르는 방식부터 잘못되었다. 나는 곡의 악상기호가 대체로 피아노(p)이니 여리게 연주하겠다는 생각에 건반을 살살 눌렀다. 그러다 보니 끝까지 충실하게 누르지 못해 간혹 소리가 빠지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음이 고르지 못했다.
레슨 선생님은 내 손등 위에 자신의 다섯 손가락을 얹고 '이런 느낌으로 건반을 눌러야 합니다'라고 시범을 보이는데, 손끝으로 꾹 누르면서 끌어당기는 듯한, 제법 강한 압력이 느껴지는 것 아닌가. 피아노 혹은 피아니시모라고 해서 단순히 건반을 살살 누르는 게 아니라, 충실하게 누르면서도 섬세한 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엄지손가락의 잘못된 사용이었다. 마치 배우가 무대 뒤편에서 대기하다가 뒤늦게 자신의 차례가 온 것을 깨닫고는 허겁지겁 등장하는 것처럼, 엄지손가락이 '툭'하고 건반 위로 떨어지다 보니 엄지가 연주하는 음만 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도입부부터 말아먹었는데, 한번 다음 악보를 보자.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바로 문제의 음들이다. 오른손 혹은 왼손 엄지손가락이 담당한 음인데, 엄지손가락으로 투포환을 하듯 건반을 내려찍으니 매끄러워야 할 멜로디가 군데군데 돌부리에 걸린 듯 튀었다. 느리고 섬세한 곡이라 투포환 공의 굉음이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엄지를 툭 던지지 말고, 엄지가 직접 움직여서 건반을 눌러야 합니다."
좀 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알아챌 수도 있었을 텐데. 집중해서 연습한다고 했지만, 역시 혼자서는 한계가 있구나.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엄지손가락을 눕히지 말고 좀 더 세워서 의식적으로 손톱 끝으로 친다는 느낌으로 연주하니 투포환 굉음이 잦아드는 것 아닌가. 그래! 이거다!
혼자 연습하는 것과 다.르.다
레슨을 받으며 새삼 깨닫게 된 것은, 내 연주가 상당히 밋밋하고 재미없다는 점이었다. 브람스가 환갑 넘어 작곡한 곡인지라 나름 힘 빼고 관조하듯이 담백하게 쳤는데, 레슨 선생님의 의견은 달랐다. 자신은 극적으로 연주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며 셈여림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곳곳에 극적인 효과를 넣도록 요구했다. 예를 들어서 아래 악보에서 내가 따로 표기한 다섯 음을 살펴보자.
혼자 연습할 때는 이 다섯 음을 별생각 없이 눌렀다. 하지만 레슨 선생님은 이 짧은 구절에도 표시한 것처럼 크레센도와 데크레센도 효과를 넣으라고 요청했다. 군대 상관의 명령이다 생각하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연주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산 송장처럼 누워있던 차가운 음들이 혈색을 되찾고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이 다섯 음뿐만 아니라 곡의 곳곳에서 비슷한 요구를 받았는데,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그 지시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음악이 생기를 얻어 과연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악보를 보면, 연속해서 화음을 누르는 부분이 등장한다. 양손으로 많으면 여덟 개의 음을 동시에 짚는데, 이때도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알다시피 검은 건반은 흰 건반보다 솟아올라 있다. 화음을 누를 때 해당 높이의 차이를 고려해 손 모양을 세심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자칫 검은 건반을 먼저 누르게 되어 동시에 울려야 할 화음이 지저분하게 된다.
화음을 누르는 손가락들에 힘을 고르게 배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대체로 엄지나 검지가 약지나 새끼손가락보다 강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누르다 보면 엄지와 검지의 음이 튀어 균형이 깨진다.
화음을 누를 때 최상성부 멜로디를 담당하는 오른손 새끼손가락 음이 도드라지도록 연주하는 것도 관건이다. 가뜩이나 약한 새끼손가락을 이용해 최상성부의 멜로디를 살리며, 각 손가락에 배분되는 힘의 균형도 유지하고, 화음이 동시에 울리도록 손 모양도 신경 써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최적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손 모양과 힘 분배를 찾아내어 언제 어디서나 재현할 수 있도록 반복 연습해 근육에 단단히 기억시킨다.
모든 레슨 내용이 피가 되고 살이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순간은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으로 파#-미-레-도# 연속 하행하는 베이스 음을 누르는 부분을 배울 때였다. 아래 악보에 빨간 원으로 표기한 부분이다.
"자, 지금 파샵을 쳤어요. 소리 들리시죠? 아직 파샵이 주위 공기 안에 남아 있죠? 이 소리를 들으셔야 해요. 들으면서 다음 음인 미를 쳐야 합니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레, 도샵까지 가는 거예요."
곡의 구조와 진행에 있어서 중심축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음들이지만, 힘이 약한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무심코 연주하면 묵직하고 탄탄한 음을 생성하지 못하는데, 레슨 선생님은 이 베이스음의 울림과 여운까지 놓치지 말고 들으며 신경 써서 꾹꾹 눌러 연주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연주 차이를 느끼는 딸들의 반응
레슨을 받는 내내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예전의 연주는 곳곳이 누수투성이인 부실공사였구나 싶다. 진지한 개인 레슨을 통해 그 하자가 낱낱이 드러나니 오히려 후련하다. 레슨 받을 때마다 이 정도 보완했으면 충분하겠다 싶었지만, 발버둥쳐 도달한 지점은 항상 새로운 배움의 출발점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전공의 영역을 살짝 훔쳐보았는데, 바늘 끝에 바늘을 세우는 작업과도 같은 디테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음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다가는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공을 들인 만큼 연주가 확연히 개선되니, 최고의 수준을 추구하는 프로라면 이 광기 어린 작업을 끊임없이 수행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내가 아마추어인 게 너무나 다행스러울 뿐이다.
한 달 동안 네 번의 레슨을 받으며 꾸준히 연습하니 놀랄 만큼 소리의 질이 달라졌다. 같은 피아노로 연주하는 데도 훨씬 깊이 있고 매끄러운 소리가 울려 나오고, 음표 하나하나에 더 많은 감정과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만 연습했다면 1년 2년 3년이 지나도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겠지. 하지만 학원을 추가로 등록하지는 않았다. 작가로서 수입이 대폭 줄어드는 동궁기(冬窮期)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일단 그동안의 배움을 토대로 열심히 연습한 후 실탄(학원비)을 마련해 날씨가 따뜻해지면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 보련다.
집에서 레슨 선생님의 지시 사항대로 연습했더니, 두 딸이 듣고서는 아빠 연주가 너무 느끼하단다. 확연히 달라진 연주 스타일이 아이들에게 제대로 포착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실력이 늘고 있다는 청신호 아닌가! 얘들아, 아빠는 한동안 느끼함조차 모르면서 초로의 대가처럼 담백하게 연주하겠다고 깝죽거렸단다. 이제야 비로소 느끼함이 무엇인지 알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치기 어린 젊음을 경험한 사람만이 현명한 노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진정 담백한 연주를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을 뿐이다. 당분간 더 느끼해질 테니 견뎌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