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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이 세상에는 하늘의 별처럼 많은 피아노곡이 있지만 나에게 단 한 곡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이 곡을 선택한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곡,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곡, 악마에게 혼이라도 팔아서 잘 치고 싶은 곡, 바로 '바흐-부조니 샤콘느'다.

운전할 때 무심결에 틀어놓은 93.1MHz 클래식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고 가슴이 터질 것 감동과 전율을 체감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렇게나 많이 들었음에도 매번 깊은 감동의 눈물이 맺히게 만드는 곡은 바흐-부조니 샤콘느가 유일하다.

꼭 연주하고 싶은 곡, 바흐-부조니 샤콘느
 
바흐-부조니 샤콘느 악보 바흐가 바이올린 독주용으로 작곡한 곡인데,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부조니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했다.
바흐-부조니 샤콘느 악보바흐가 바이올린 독주용으로 작곡한 곡인데,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부조니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했다. ⓒ 임승수
 
원래 위대한 바흐가 바이올린 독주용으로 작곡한 곡인데,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부조니가 바흐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했다. 연주 시간이 15분 가까이 소요되는 대곡이고,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부조니가 자신의 역량을 남김없이 쏟아부은 터라 엄청난 기량을 요구하는 난곡이기도 하다.

한동안 이 곡을 감상만 하다가 문득 2년 정도 꾸준히 연습하면 못 칠 것 있겠냐 싶어 2021년 2월에 악보를 구입했다. 딱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최애곡을 내 손으로 연주할 수 있다면 꽤 그럴싸한 인생 아닐까 싶었다. 도입부에서 여덟 마디 주제가 제시되고 이후 끊임없이 변주되는 형식인데, 다행히 주제와 초반의 변주는 그럭저럭 칠만했다. 하지만 70마디를 넘어서면서 냉혹한 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정말 어렵구나!

연습이 제대로 안 풀려 답답할 때면 이미 손에 익은 다른 곡을 연주하며 마음을 달랬는데, 그 곡이 바로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였다. 연주 시간 5분 남짓에 상대적으로 쉽고, (샤콘느 만큼은 아니지만) 워낙 아끼는 인생곡이기도 하다. 공부하기 싫다고 엄마에게 투정 부리는 아이 심정으로 이 곡에서 위로를 받다 보니, 애먼 브람스 인터메조의 완성도만 높아졌다.

아무리 좋아하는 대상이 있더라도 그쪽에서 마음을 열지 않고 차가운 시선만 보낸다면, 사회성이 결여된 스토커가 아닌 이상 누구든 지치고 포기하게 된다. 그래.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지. 무식하니 용감하다고, 내 주제에 전공생도 버거워하는 '바흐-부조니 샤콘느' 악보를 구입한 것부터가 만용이었어. 만남이 있다면 헤어짐도 있기 마련 아닌가. 이제 미련을 버려야 할 때다.

50대 어부가 라 캄파넬라를 치게 되기까지
 
라 캄파넬라를 완주한 어부 요시아키 토쿠나가 씨 테트리스 게임처럼 막대기가 떨어지는 영상으로 건반 위치를 확인하고 해당 음을 찾아 누르며 외우기 시작했다.
라 캄파넬라를 완주한 어부 요시아키 토쿠나가 씨테트리스 게임처럼 막대기가 떨어지는 영상으로 건반 위치를 확인하고 해당 음을 찾아 누르며 외우기 시작했다. ⓒ TBSテレビ
 
그렇게 시나브로 바흐-부조니 샤콘느와 멀어지던 어느 날, 네이버 카페 '피아노 사랑'에서 우연히 한 게시물을 읽었다. 어떤 회원이 일본 잡지를 번역하다가 재미있는 기사를 봤다며 올린 글이었다.

피아노 한번 쳐 본 적 없는 50대 아저씨가 우연히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을 듣고 제대로 취향을 저격당해 9년 동안 이 곡만 죽어라 연습해 공연까지 했다는 사연이었다. 어라? 이런 일이 있네? 흥미를 느껴 관련 정보를 검색하니 한글 자료는 없고 일본어 자료만 나온다.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구글 번역기의 힘을 빌려) 어렵게 파악한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 사가현 사가시에 사는 요시아키 토쿠나가(義昭徳永)씨는 고교 졸업 후 인근 아리아케해에서 수십 년간 김 양식에 종사한 어부다. 하루 24시간이 일(6시간)–휴식(6시간)–일(6시간)–휴식(6시간)의 사이클로 돌아가는 거친 바다 사나이다. 일 년의 절반은 그렇게 고된 일정을 소화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다음 해 김 양식을 준비하는 다소 여유로운 시기가 온다. 이 기간에 그는 유일한 취미인 파친코를 하면서 보냈다.

하지만 너무 빠져든 나머지 2개월 만에 70만 엔(한화로 약 800만원 가량)이나 잃고선 엉겁결에 아내의 지갑에까지 손을 대게 되자, 어느 날 '여기까지 떨어졌는가' 싶어 파친코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취미가 없어져 그저 멍하니 TV만 보던 2012년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52세였던 토쿠나가에게 운명처럼 피아노가 다가왔다.

TV에서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의 '라 캄파넬라' 연주를 들은 것이다. 엔카를 좋아하고 클래식 음악이라고는 전혀 관심도 없었지만 후지코 헤밍의 따뜻하면서도 연민이 느껴지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연주에 큰 감동을 받았고, 이 곡을 직접 연주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음대를 졸업하고 피아노 선생님을 하는 아내 치에코에게 '라 캄파넬라'를 치고 싶다고 하니, 돌아온 대답은 "아마추어가 라 캄파넬라를 연주할 방법은 없다. 절대 무리!"였다. 그동안 피아노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심지어 악보조차 볼 줄 모르는 남편이, 피아노를 배워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전공생도 버거워하는 라 캄파넬라를 연주하겠다니! 남편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조차 비협조적인 데다가 악보도 볼 줄 모르는 토쿠나가는 궁여지책으로 유튜브에서 '라 캄파넬라' 관련 영상을 검색했다. 마침 라 캄파넬라를 연주할 때 해당 건반 위에 테트리스 게임처럼 막대기가 떨어지는 영상을 발견한 그는, 아내의 피아노를 빌려 일일이 영상을 멈춰가며 막대기와 건반 위치를 확인하고 해당 음을 찾아 누르며 외우기 시작했다.

오른손 연습, 왼손 연습 번갈아 가며 매일 8시간씩, 어떨 때는 너무 열중한 나머지 12시간에 이르기도 했는데, 그렇게 석 달을 꾸준히 연습해 라 캄파넬라 전곡을 외웠다. 52세에 처음으로 피아노 연습에 재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이후 꾸준히 연습을 지속하며 실력 향상 과정을 유튜브 동영상으로 올렸는데, 중년 어부의 라 캄파넬라 연주 도전에 감동 받고 용기를 얻은 이들의 응원 댓글이 연이어 달리고 일본 각지의 학교로부터 연주를 듣고 싶다는 초청이 이어졌다.

2020년 1월 13일에는 일본 TBS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삶을 바꾼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을 만나 김 양식 어부 일로 단련된 두툼한 손가락으로 직접 라 캄파넬라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환갑이 다 된 토쿠나가가 후지코 헤밍을 만나 아이처럼 기뻐하며 연신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무척 인상에 남는다.
 
후지코 헤밍을 만난 토쿠나가 일본 TBS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후지코 헤밍을 만나 직접 라 캄파넬라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후지코 헤밍을 만난 토쿠나가일본 TBS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후지코 헤밍을 만나 직접 라 캄파넬라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 TBSテレビ
 
2021년 5월 27일에는 모교인 카와소에 중학교를 방문해 전교생 279명 앞에서 라 캄파넬라를 연주한 후, '좋아하는 꿈과 목표를 가지고,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열심히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특히 이날은 결혼 ​​30주년(2017년)에 아내를 위해 연주했던 'Forever Love'(엑스 재팬)도 선보였다. 그는 아내 다음으로 피아노가 소중하다며 '자신만으로는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가족이나 동료와 꿈을 공유하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요시아키 토쿠나가의 유튜브 채널을 방문하니, 최근 후지코 헤밍의 연주회에 초청되어 무대에서 라 캄파넬라를 연주할 기회를 얻고 있었다. 연주회 준비 리허설 영상을 보니 2013년에 처음으로 올린 연주와는 비교도 안 되는 발전이 있었다.

☞ 동영상보기 https://youtu.be/eXz6HjWvBrY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의 이야기를 조사하다 보니 한 편의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느낌이다. 피아노곡 하나가 클래식 음악에 전혀 관심도 없던 50대 남성의 마음을 얼마나 뒤흔들 수 있는지,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 얼마만큼의 끈기와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지, 그렇게 발휘된 끈기와 인내의 결과물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토쿠나가의 사례는 거짓 없이 보여준다.

조사를 마치고 바흐-부조니 샤콘느 악보를 꺼내 들어 찬찬히 마디 수를 헤아려 보았다. 전체 262마디다. 하루에 1마디씩 정복하면 1년 안에 완주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단순명쾌한 해법을 왜 전에는 떠올리지 못했을까. 달팽이가 전진하는 속도일지언정 에둘러 가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그런 의지가 부족했구나.

토쿠나가 씨가 라 캄파넬라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게 52세인데, 나는 그보다 젊다. 게다가 나는 이미 악보도 읽을 줄 알고 브람스 인터메조도 제법 그럴싸하게 연주할 수준의 기량을 보유하고 있다. 그가 어부 일을 하면서 라 캄파넬라를 연습했듯이, 나도 작가 일을 하며 틈틈이 피아노를 치면 될 일이다.

'좋아하는 꿈과 목표를 가지고,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열심히 할 수 있다.'

두텁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라 캄파넬라를 연주하는 바다 사나이의 이 묵직한 한 마디가 중년 남자의 의지박약을 단박에 날려버리는구나. 오늘부터 하루에 한 마디다!

#임승수#라 캄파넬라#요시아키 토쿠나가#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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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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