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추적단 불꽃>이 불법 성착취사이트 실태와 BDSM 위험성을 고발합니다. 잘 안 보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인권 침해 문제를 <추적단 불꽃>은 그동안 끈질기게 추적해왔습니다. 또한 디지털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연대도 구축하고 있습니다. <추적단 불꽃>의 기획 보도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편집자말] |
우리는 BDSM(인간의 성적 기호 중에서 기학적 성향을 통틀어서 말함)을 취재하며 안전과 즐거움이 보장되는 플레이(BDSM 행위를 하는 것)가 과연 가능할지, 근본적인 고민이 들기도 했다. 취재를 하며 BDSM 관계 내 피해를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BDSM 플레이를 하기 전 서로가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플레이의 기본이다. 그렇기에 SSC(Safe, Sane, Consensual, 안전한, 제정신의, 상호합의)가 중요하다. 플레이에 앞서 반드시 정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세이프 워드(Safe Word) 혹은 세이프 시그널(Safe Signal)이다. 세이프 워드와 세이프 시그널은 BDSM 플레이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경고 신호다. 플레이를 진행하다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더 플레이를 진행할 수 없으면, 플레이를 중단하는 비상벨인 셈이다.
그러나 세이프 워드와 세이프 시그널 설정이 안전한 BDSM 플레이를 100%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플레이어가 세이프 워드를 뱉을 수 없는 상태가 되거나, 세이프 시그널을 줄 수 없는 상태가 될 수 있어, 상대의 상태를 지속해서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SSC 관련 인식도를 알아보기 위해, 트위터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온라인 성 문화 조사 : BDSM 문화를 중심으로>(전체 응답자 총 280명, 응답 기간: 21.11.09.~21.11.14.)를 진행했다. 그 결과 청소년(14세 이상 20세 미만)과 성인(20세 이상)의 인식 차이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에 참여한 청소년(총 58명) 중 세이프 워드를 안다고 답한 이는 53명(91.4%), 모른다고 답한 이는 5명(8.6%)이었다.
성인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설문에 참여한 성인(총 212명) 중 세이프 워드를 안다고 답한 이는 194명(91.5%), 모른다고 답한 이는 18명(8.5%)이었다. BDSM 플레이를 해본 청소년과 성인 97명은 전부 세이프 워드를 알고 있었다. 이처럼 'BDSM과 합의의 관계'를 인식하는 데 청소년과 성인이 비슷한 양상을 띈 데는, 나이와 상관없이 BDSM 성향자들이 주로 인터넷에서 BDSM 관련 정보를 얻고 네트워킹하는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됐다.
그리고, SSC(Safe, Sane, Consensual, 안전한, 제정신의, 상호합의)를 실천하는 성향자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우리는 SSC를 실천하는 J씨와 K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BDSM '안전한' 관계는 가능했다
실질적인 권력은 '돔'이 아닌 '섭' - J씨
"흔히 BDSM 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도미넌트(돔)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쪽은 서브미시브(섭)이다. 도미넌트는 결코 서브미시브의 한계 이상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되며, 따라서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한계가 어디인지, 서브미시브와의 충분한 합의를 바탕으로 관계를 이끌어내야 한다. 즉, 결국 BDSM 플레이의 성공 여부는 서브미시브가 허용한 한계 내에서 도미넌트가 얼마나 잘 이끌어내며 상호 만족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물론 이러한 충분한 합의를 위해서는 가장 기본이 될 세이프워드는 물론이고, 대화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몸으로 할 수 있는 신호들이 상호 합의가 되어야 한다. 관계가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엔 적응에 물론 시간이 걸린다. 이 과정에서 도미넌트는 서브미시브를 위해 애프터 케어(BDSM 플레이 후 진정기간)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의 BDSM관계는 섹스 외에 데이트나 일상생활에서까지도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피임과 성병에 대한 안전은 물론이며, 플레이 도중 다칠 수 있는 부분을 최소화하며 안전한 플레이를 해야 하고, 만일 다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이에 대한 케어까지 책임져야 한다."
서로를 존중할 때 비로소 가능한 플레이 - K씨
"성인인증이 가능한 여러 사이트를 접속하며 BDSM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접했다. 새로운 정보들이었기에 자칫하면 잘못된 정보를 사실로 인식할 수 있었지만 이성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가장 기초적인 인식에서 보면 어긋난 정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BDSM은 상하 지위가 있는 관계지만,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단순한 폭력이 되어버리기 쉽다. 나의 첫 플레이 상대는 BDSM초심자였던 내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알려줬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 트위터에서 처음부터 반말로 구인하는 이들을 거르라는 등의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BDSM의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고 원하는 강도 역시 다르겠지만, 궁극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 없이 플레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설령 플레이 도중 피해를 입을지라도, 그들이 부족한 게 아니다. 상대방의 신뢰를 이용한 가해자가 문제다."
BDSM에서 '합의'란 무엇인가
우리와 인터뷰한 이들의 취향과 성격, 나이 등은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이 말하는 BDSM의 필수 요건은 바로 합의와 안전이었다. 추적단불꽃은 총 5명의 성향자들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며 성향자들끼리 합의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었다. ㄱ씨는 "서로의 건강 상태와 성병 여부를 공개하고, 이후 혹여라도 문제가 발생할 것을 대비해 연락처와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공유한다"고 말했다. 이후 개인의 안전과 아웃팅을 예방하기 위해, 촬영이나 제삼자를 플레이에 초대하는 행위 등과 관련해서는 더욱 철저히 규칙을 정할 것도 강조했다.
ㄴ씨는 세이프 워드, 강도, 횟수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 등을 정하고, 애프터케어 시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응급상황 시 대처하는 방법(근처 병원의 위치를 알아놓는 등) 등 역시 사전에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ㄷ씨는 BDSM 플레이에서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지와 기구를 어떻게 관리해왔는지 또한 상대에게 공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안에서 합의하는 방법 또한 다양했다. 암묵적인 합의부터 구두, 문자, 서면, 영상 합의 등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인원 모두, 암묵적인 합의는 추천하지 않았다. 이유는 "문제가 생겼을 경우, '암묵적으로 합의하지 않았냐'는 질타를 받았을 때 내세울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ㄱ씨는 최대한 합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의논하고 문자 등으로 남겨둘 것을 추천했다.
ㄹ씨는 영상으로 합의를 진행하면 아웃팅 혹은 협박의 위험이 있으므로 신중하게 작성 해야 하며, 개인정보 유출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ㅁ씨는 "커뮤니티나 SNS 등에 BDSM과 관련한 '계약서'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문서들이 있다, '주인'은 '노예'를 매각할 수 있으며, 주인이 노예를 임대 또는 매각하여 금전적 또는 이에 상응하는 수익은 전적으로 주인에게 귀속된다는 등의 조항도 있다"며 "이런 계약서를 사용하게 되면 원치 않은 행위를 강요받을 수도 있다"라고 조언했다.
비디에세머이자 <S&M페미니스트>의 저자 클라리스 쏜은, "BDSM을 시작하기 전,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동의는 변화하며 협상이 진행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비해 BDSM 관련 논의가 활발한 미국은 비디에세머를 위해 존재하는 500개 이상의 교육 및 사회 조직이 있다. 그 중 한 단체인 커뮤니티 '네트워크/라레드'(Network/La Red)는 LGBTQ를 비롯한 SM 등의 관계 내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을 지원하는 활동 단체다. 이들은 학대와 BDSM의 근본적인 차이가 '동의'에 있다고 지적했다. "명확하게 동의하지 않았다면, 싫다고 말하기 두려웠다면,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알았다고 말한다면, 싫다고 할 때 결과(실직, 가정 파탄, 아웃팅 등)가 두려워서 '알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의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적극적 합의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을 지원하며, 시민사회가 피해자의 관점으로 성폭력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왔다. 그러면서 모든 성적 관계가 적극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함을 역설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정의한 '적극적 합의'는 이렇다.
적극적 합의란 성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동의한 데에 있어서 드러나는 공통의 요소들을 말한다. 항변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고 해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성적 행위에 대한 동의는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거나, 동의했다는 자각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적극적 합의란 성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이고, 의식적이며, 자발적인 동의이다. 성행위에 관여한 모든 사람은 그 또는 그녀가 상대방과 성적 행위에 대한 적극적 합의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BDSM은 물론이고 모든 성관계에 있어서 적극적 합의는 필수다. 상대의 침묵을 동의라고 착각하여 상대의 의사를 으레 짐작하고 행동한다면, 그게 바로 성폭력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성관계 동의 문화 외에도 변해야 할 건 또 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에게 범죄의 원인을 찾는 시각이 존재하기에 그렇다. 피해자가 피해 이후 무기력해야만 하고, 울어야만 하는 등 사회가 만든 '피해자다움'을 강요한다. 범죄의 피해를 보았을지라도,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피해자다움이라는 틀 안에 피해자의 행동이 합당하지 않다면,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부터가 힘든 현실이다. '피해자다움'은 BDSM 성향자들을 더욱 옭아매 성범죄 피해자 중에서도 더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성에 대한 갇혀 있는 보수적 인식이 특정 성향을 갖고 있는 이들을 범죄 사각지대로 몰고 있음을 이제는 직시해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