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러분의 삶에 가장 필요한 '정책'은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앞으로 5년간 우리 삶을 좌우할 20대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마이뉴스>는 국민이 어떤 공약을 원하는지, 지금 각 분야엔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대신 전달하려고 합니다.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도 환영합니다. '2022 대선 정책오픈마켓', 지금부터 영업을 시작하겠습니다. [편집자말] |
저는 택배 노동자입니다. 이번 20대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등록할 모든 후보님들께 드리는 편지글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택배 노동자는 '책임'이 셀프
모두가 아시겠지만 그래도 택배 노동자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간단한 사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택배 노동자들은 개인사업자입니다. 법적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노동자입니다. 이른바 '특수고용형태'의 노동자입니다.
법적으로 개인사업자 신분이다 보니 택배 일을 시작하게 되면 생소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식당에서 '반찬이 셀프'라면, 개인사업자들에게는 '온갖 책임이 셀프'인지라, 그 누구도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고려해주지 않습니다. 아프면 그만두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에서 개인사업자인 택배 노동자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택배 노동자들은 바지런합니다. 오랜 경험상 대체로 그렇습니다. 천성이 바지런한 것도 있겠지만, 바지런 떨지 않으면 점점 뒤처져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마치 택배 노동자들의 삶은 트레드밀(러닝머신) 위에서 매일 제자리 걸음을 하는 듯합니다. 아프면 그만두듯 바지런하지 못한 택배 노동자들도 구역을 빼앗기거나, 임금이 줄어드는 등 생태계에서 도태됩니다.
20여 년 간 택배 노동자의 임금 기준은 매년 감소세를 보여왔습니다. 하루 100개를 배송하면 가족의 한 달 먹을 거리를 마련하고 가족들과 저녁이라도 함께 먹을 시간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같은 돈을 벌려면 120개, 150개를 배송해야 했고, 이제는 심지어 500개 이상을 배송해야 20여 년 전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최저 시급에도 이르지 못하는 수준으로 임금 기준이 떨어지자 택배 노동자들은 일하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택배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 시간은 주 73시간을 넘기기 일쑤였고, 개인 시간이 줄어드니 삶은 팍팍해져갔지요.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은, 생존을 위해 견뎌야 하는 형벌이 되어갔습니다.
노조법 개정해 원청의 사용자성 명시해야
택배 노동자의 삶은 그닥 우리네 관심사에 속해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2020년 7월에 배송하다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져 끝내 돌아가신 고 서형욱 택배기사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세상은 폭발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그 죽음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결국 내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 한 켠에는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인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돈(混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알지 못하는 어느 누군가의 죽음이 아닌 공감이 가는 죽음이라는 깨달음이 우리 마음을 움직였겠지요.
대한민국에서 정년 이후의 삶에 대한 생존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는 기본소득, 청년수당 등은 앞으로 늘어날 사회 불안을 줄여나가는 주요한 연결고리가 될 것입니다. 이는 점차 확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영양 주사를 놓는다고 하루아침에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듯이 병에 맞는 근본적인 치료법이 필요합니다. IMF구제금융 체제 이후 노동자에 대한 일체의 면죄부를 받아온 원청의 사용자성을 공식화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핵심 과제일 것입니다.
마침 2021년 6월 중앙노동위원회는 원청 사업주인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와의 단체교섭에서 사용자 지위에 있다며 단체교섭 거부가 부당노동행위라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직접 계약 당사자가 아닌 원청이 부분적으로라도 기본적인 노동조건 등을 지배·결정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다면 노조법상 사용자로서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이제는 노조법 개정을 통해 원청의 사용자성을 명시하고, '간접고용 노동자에 대한 원청 사용자의 교섭 의무'를 제도화해야 할 것입니다.
택배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CJ대한통운의 노동자들이 한 달 가까이 파업을 진행하고 있고, 우체국 또한 사회적 합의를 이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합의를 주도해온 당사자인 정부조차 선뜻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은 택배 노동자들을 합의의 대상이 아닌 합의의 도구로 여겼기 때문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합의 전제가 되는 것은 합의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갖는 이해와 존중일 것입니다. 합의의 한 축인 택배 노동자들이 '사회적 합의 이행'을 내걸고, 단식을 하고 파업을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 합의 당사자들이 다시 모여 이를 점검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안 문제에 대한 후보님들의 입장 발표가 필요하리라 생각하며, 차기 정부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사회적 합의라도 실질적 이행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함께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라 할 것입니다.
한국형 상병수당 제도 정착 필요해
대한민국에는 아파도 쉬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특히나 택배 노동자들은 아프면 자신을 대신하여 배달해줄 사람을 자발적으로 구해야 하는데, 아파서 쉬면 하루 일당이 사라지고, 용차 비용은 보통 2배 정도이니, 하루를 쉬면 3일을 '공치는' 조건에서 어지간히 아프지 않으면 쉴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택배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다가 골병이 들고, 더 이상 미루지 못해 병원에 가면 치유가 힘든 상태에 놓이게 되고, 심지어 과로로 사망하는 경우마저 발생했던 것이 불편한 진실입니다.
택배 노동자들은 전속성과 종속성이 강해 노동자성이 강한 직종이지만, 쉬고 싶다고 쉰다면 돌아오는 답변은 경고장 내지는 계약 해지 통보서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부조리한 현실은 비단 택배 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닙니다. 차기 대통령은 아프면 쉴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권리가 상식이 되는 국가를 만들어나가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 반영될 수 있는 소통 구조를 만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병수당과 법정 유급휴가에 대한 논의가 진척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아직도 현실성을 기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택배 노동자들의 80% 이상은 크고 작은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고, 그중에는 당장 입원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경우도 상당합니다.
현재 상황에서 특수고용노동자에게 상병수당과 법정 유급휴가가 적용될지도 미지수이나, 적용된다 하더라도 택배 노동자의 대표 주요 질환인 근골격계 질환이 빠진다면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각 직군에 맞는 대표 주요 질환들이 누락되지 않는 실효성 있는 한국형 상병수당 제도가 정착되어야 할 것이라는 제안을 드립니다.
현 정부 취임 첫 해에 비해 임기 말 정규직 비율(통계청, 2021)은 67.1%에서 61.6%로 줄었고, 비정규직은 32.9%에서 38.4%로 늘었습니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수준도 55%에서 53%로 줄어들었습니다. 우리네 삶이 그만큼 팍팍해졌다는 객관적 증거 자료입니다.
우리는 이번에도 5년 전과 마찬가지로 공정과 정의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섣부른 기대는 하지 않을 셈입니다. 짝사랑하던 이에게 버림받았을 때의 마음의 상처는 헤아릴 길이 없더군요.
우리는 지금 상상력 빈곤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상상력에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1968년의 기운이 필요한 것일까요? 20대 대선에서는 상상력을 가진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