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어딘가 남과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서른에야 ADHD라는 병을 처음 알았고,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았습니다. 실체를 모르는 병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사람들 각자가 품고 사는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친 후 자신에게 맞는 생활을 찾은 지금, 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손을 흔들어 봅니다.[편집자말] |
새로 발견한 빵집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거 되게 맛있어 보이네… 아니야. 빵 끊은 지가 언젠데. 게다가 여긴 쌀빵도 아니잖아.' 몇 걸음 더 가니 다른 빵집이 나온다. '뭐야! 여기 쌀빵 전문점 왜 생기는데??' 들어가서 구경만 할까 하다 가까스로 '모든 종류의 가공탄수화물을 끊으라'던 의사의 말과, 필연적으로 찾아올 염증 반응을 떠올린다.
떨치듯 고개를 돌리니 옆집에서 수제찹쌀고로케를 팔고 있다. 난이도가 높다. 꼭 그렇게 수제와 찹쌀과 고로케를 조합시켜야만 했나. 길을 건너 달아나자 곱게 기름 바르고 누운 색색의 떡들과 눈이 마주친다. 꼬마 때부터 '떡순이'였던 내 머릿속에서 참새 백 마리가 짹짹거린다. 못 알아보는 거니? 여기가 방앗간이잖아!
모든 관문을 통과하고 집에 도착하면 인내심이 아주 넝마다. 몇 년 전만 같았어도 지체 없이 들어가 끌리는 대로 질렀을 거다. 잘 참아낸 나에게 포상을 해 주고 싶지만 원하는 상으로 탄수화물 주전부리 말곤 떠오르지 않는 게 슬프다.
글루텐 불내증이 생긴 지는 오래됐는데, 꿩 대신 닭으로 삼던 타피오카 전분이나 쌀국수, 떡 등마저 최근 몸에 안 맞게 됐다. 뭘 먹고 사냐고? 밥과 반찬, 가공하지 않은 구황작물을 먹는다. 지구상에 밤, 호박, 고구마, 옥수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맞다. 어쨌든 달아야 한다.
중독의 변명들
내가 사랑한 빵, 과자, 케이크, 초콜릿, 생크림 등은 '초기호성식품(Hyperpalatable food)'이다. 말 그대로 엄청나게 기호를 자극하는 식품. 정제 설탕과 밀가루, 지방, 소금 함량이 높아 큰 쾌락적 보상을 제공하고 도파민을 급증시키는 음식이다. 신경과학자들은 단맛에 '내인성 아편유사물질계'(엔도르핀 같은 아편 유사물질의 체내 분비체계)를 활성화시키는 기능이 있어 중독성과도 연결된다고 지적한다. 누가 좀 알려주지!
사실은 대충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어디 갖다 놔도 어정쩡한 자신에 대해 수치심이 들면 우울감이 딸려왔고, 그런 때 케이크를 입에 넣으면 내면의 아이는 칭얼대길 잠시 잊었다. 달콤함은 가장 빠른 보상이자 보장된 위안이었다.
ADHD가 있는 경우 기호품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약물의존 전문가인 칸치안 박사는 이를 '자기투약(Self-medication)' 현상으로 본다. 니코틴과 카페인 등으로 각성 수준이 떨어진 뇌를 스스로 자극해 주의집중력을 높이려 하거나, 알코올처럼 각성 수준을 떨어뜨리는 물질로 불안을 해소하려는 것이다. 매번 소환되는 변명들-충동성, 감정의 불안정성, 낮은 스트레스 내성, 자극 추구 성향-은 중독 문제와도 뗄 수 없는 관계다.
약골인 게 이런 면에선 다행이다. 나도 커피, 담배, 술을 두루 사랑했지만, 이 종잇장 같은 몸이 소량의 카페인, 니코틴, 알코올에도 흠씬 두들겨 맞는 덕분에 저절로 멀어졌다. 대신 활력을 높이고 기분을 띄워주는 당분의 특성에 그만큼 의존했다. 티가 바로 안 나서 더 문제인 줄은 미처 모르고.
여기에 '정크채식'이 더해지자 마침내 문제가 드러났다. 5년 간, 단백질이 부족해 찾아오는 공복감을 쭉 인스턴트와 밀가루 음식으로 달랬다. 환경을 위한다는 취지는 좋았는데 방식이 엉망이었다. 삼시세끼, 간식, 후식, 야식은 빵-과자-면-빵-과자. 이 정도면 채식이 아니라 '당식'이다.
중독될 바에야 담배나 술, 마약, 도박보단 음식이 나아보이지만, 해악은 예사가 아니다. 아기엉덩이 같던 내 얼굴에 성인여드름이 창궐한 스물일곱 때부터 만성위염, 위경련, 부신피로증후군과 오래도 지지고 볶았다. 웬만큼 먹었어야지. 몸의 균형이 깨져서 더 피곤하고 멍해지고, 그럼 실수가 늘어 우울해지고, 우울해서 또 단 걸 찾는 완벽한 악순환.
지금은 대사증후군과 자가면역질환의 오케스트라가 몸 여기저기를 돌아가며 연주한다. 작년엔 그 때문에 수술까지 했으면서 여전히 내 뇌는 파블로프의 개다. 사둔 과자를 버리려다가도 뜯어서 한 입을 넣고야 마는 나. 씹다가 뱉을지언정 기어이 달콤함을 혀에 휘감아야 평온을 찾는 나. 그 후에 떠오른다. 맞다, 지금 파는 거 내 무덤이었지? 한때 '단 거[당거]'를 'Danger'로 표기해 읽는 농담이 유행했는데, 말장난이지만 뼈를 때린다.
바쁘니까 파프리카
'이제 슬슬 끊어지는 거 같은데?' 싶을 무렵,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매일같이 출시되는 신기한 상품들은 내 간장종지만 한 인내심을 탁탁 깨뜨리고, 유독 군것질에 더 불타오르는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골라먹으면 되지"라는 생각에 '글루텐프리' '오가닉' 등의 이름이 붙은 상품을 찾는 분들께는 신중하시라 말하고 싶다. 중요한 건 명칭이나 일부 성분이 아닌 영양균형이다(나도 이런 '건강 후광' 현상에, 식품전성분표기를 정독하고 검색해도 알 수 없는 모호한 영양정보에 매번 타협했다).
고개만 돌리면 유혹 투성이인 환경을 조금씩 바꾸기로 했다. 되도록 마트에 안 가고, 지역농산물 정기배송을 이용해 냉장고를 채워버렸다. 자꾸 식재료가 쌓이니 귀찮지만 요리를 할 수밖에. 내 요리는 '괴식'으로 불렸지만 어쨌든 내 입맛엔 맞았다. 알바를 갈 때 도시락을 싸게 됐고, 군것질 횟수를 줄이면서 단맛에 절었던 미뢰가 차츰 살아났다.
처음에는 식품을 식품으로 대체하는 것만 생각했다. 입이 심심해지면 초코바 대신 채소스틱, 견과류, 과일을 먹는 식으로. 바쁘니까 간편식 대신 '바쁘니까 파프리카!'라는 자기암시를 걸며 와작와작 파프리카를 씹었다. 그런데 한계가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시 당이 확 당기는 거다. 생활에서 뭔가 빼내며 참고 있다 여기니 결핍감이 들었다. 그래서 또 허기가 지고, 좀비처럼 단 음식을 찾아 움직였다.
즐거움의 알고리즘
중요한 답이 하나 더 있음을 알게 된 건 최근이다. 다른 걸 먹는 것뿐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즐거워지기. 도파민은 자극적 기쁨을 갈구하게 한다. 그러나 원하는 걸 가졌을 때 도파민이 주는 기쁨은 강렬한 만큼 짧다. 또, 같은 수준의 보상에는 도파민이 더 이상 분비되지 않기 때문에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된다. 이것이 중독 행동이 된다.
반면 현재지향적 신경전달물질들-세로토닌, 옥시토신, 바소프레신, 엔도르핀 등-은 지금 가진 것에서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이 물질들이 나올 때 도파민은 자리를 비켜준다.
명상을 하고, 햇빛 아래 걷고, 밥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을 때. 이 순간 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소소하고 단단한 기쁨에 집중할 때. 말하자면 인생을 함께한 가공탄수화물을 떠나보내는 일은 삶의 태도에까지 걸쳐 있는, 사이즈가 큰 문제였던 거다.
요즘 나의 대체 쾌락은 '산책하면서 오디오북 듣기'다. 사실 이것도 내겐 '1년에 100권 읽기'라는 목표로 향하는 도파민의 활주로다. 하지만 읽고 싶던 책에 빠져있는 동안은 그 상태 그대로 만족감을 느낀다.
외부에서 오는 감각적 경험보다 내적 경험에 집중하는 습관도 만들어진다. 마음의 여유가 좀 생기니 선택에 앞서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따져볼 수 있었다. 건강, 돈, 시간의 효율성으로 나를 설득하며 더 나은 선택을 하는 횟수가 늘었다.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치른 값이 크다. 그래도 어휴, 정말 살았지 뭔가. 이런 식탐에 ADHD 특유의 대책 없는 금전 감각까지 한편을 먹고 있으니, 몸이 제동을 걸지 않았더라면 월세집 보증금도 못 모으고 와플 천 개를 사 먹을 뻔했다.
생활 속 '쾌락의 중심'을 조금씩 밀어서 옮기는 일. 돌아보면 이건 마음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었다. 거창하게 말해 모든 걸 소비자의 선택에 책임지우는 자본주의의 그림자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근육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렵다. 일상을 둘러싼 '세상'과 종일 싸우는데 어떻게 매번 이길까? 사실, 나도 아직 빵집 앞에서 망부석이 된다. 어떤 땐 거침없이 사서 위장에 넣어버린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서 말이다. 아, 세상엔 왜 이다지도 참아야 될 게 많은가.
덧붙이는 글 | * 키마 카길 교수는 책 <과식의 심리학>에서 중독성 물질과 초기호성식품의 유사성을 상세히 지적합니다. 그 중 일부에 따르면 당 지수와 탄수화물 함량이 높은 음식을 섭취하면 인슐린이 증가해 에너지를 지방으로 축적하지만 식욕 촉진 호르몬인 ‘그렐린’이 억제되지 않아 여전히 허기를 느낍니다. 또한 ‘지복점’(어떤 소비가 주는 만족도의 최대치)을 자극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식품은 대개 식욕 억제 호르몬인 렙틴을 파괴해 결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최근에야 음식에 중독성이 있다는 점이 입증됐기 때문에 현재 DSM-Ⅴ(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의 2013년 개정판)에는 음식 중독이 물질사용 장애의 진단 범주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음식 중독은 특정 음식을 과도하게 섭취하는 것으로, 폭식 장애와는 다릅니다.
* 글쓴이의 브런치 페이지에도 게재됩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adhdworker)
* 다음 화는 성인ADHD의 잠재된 충동성과 자기검열, '분위기 파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