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약자에게 가혹합니다. 법의 바깥으로 내몰린 삶도 존재합니다. 유권자가 가장 대접 받는 대선 시기, 유권자로 주목받지도 호명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가 만납니다. 이들을 대변하는 정치를 꿈꿉니다.[기자말] |
국내 HIV(후천성면역결핍증) 감염인은 에이즈가 아니라 자살로 사망하는 경우가 더 많다. HIV 감염인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고, 유독 이 바이러스에 대해선 비과학적 낙인이 심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달로 이제는 HIV에 감염됐다 하더라도 약만 잘 먹으면 건강하게 보통 수명만큼 살 수 있다. 그럼에도 2030 연령대의 HIV 감염인 중 '지난 1년 간 자살 생각을 해봤다'는 응답은 절반이 넘게 보고된다(2018년 러브포원 조사). 이는 같은 연령대의 비감염인보다 약 20배 높은 수치다. 자살 생각 20배라는 수치가 나타내는 그 무게가 상상이 되는가. 감염돼도 죽지 않는데, '감염되면 죽는다'는 낙인이 오히려 감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HIV 감염인들은 이미 우리사회 곳곳에서 이웃으로 살아오고 있다. 하루에 한 번 약을 복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감염되기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을 넘어뜨리는 것은 감염인을 향한 차별과 혐오다.
낙인의 발현, 전파매개행위죄
특히 에이즈예방법 19조는 '감염인은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HIV 전파 여부와 무관하게 '전파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성관계 등 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국가가 감염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할 뿐더러, 개인적인 사생활 문제를 법 위반으로 내모는 인권침해적 제도다.
대선 시기,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 10일 HIV 감염인 청년 당사자들의 공동체인 '한국 청소년·청년 감염인 커뮤니티 알' 회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간담회에 참석한 이들은 소주, 소리, 포니라는 별칭으로 불린다고 했다. 대화 도중 이재명 후보의 탈모약 공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들은 "탈모 유권자 인구가 더 많으니까 탈모인들이 겪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거지"라며 웃었다.
- 반갑습니다. HIV 감염인 중에서도 청년들끼리 모이는 커뮤니티를 만들게 된 이유가 있나요?
소주: "감염인이라는 것 자체로 우리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는데, 감염인 커뮤니티에 가도 형님들만 있고 청년들은 그 안에서 잘 못 섞이더라고요. 그래서 젊은 감염인들끼리 편안하게 모이는 커뮤니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011년 당시에 부산에서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가 개최됐는데, 그때 하도 '외국에서 에이즈 환자들이 들어온다'며 호들갑을 떨어서 대회 참여자들이 출입국에 문제도 발생하고 경찰들과 실랑이도 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도 뭔가를 좀 해보자는 에너지가 모였던 게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지금은 단체가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에 가입된 회원수가 500명 정도예요."
- 에이즈예방법이 전파매개행위를 처벌하고 있잖아요. 감염인으로서 나의 존재를 국가가 어떻게 대우하고 있다고 느끼나요?
소리: "감염인이라는 존재, 그리고 우리가 맺는 관계를 국가가 불법화시키는 거죠.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언젠가 이 조항이 나에게 적용이 돼서 내가 언젠가는 범죄자가 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존재해요."
포니: "사실 자신이 감염인인 것을 알고 약을 복용하는 사람은 성관계를 해도 상대를 감염시킬 확률이 0%라는 것이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는데, 이 조항이 감염인을 상대로 악용될 때가 많거든요. 예를 들어 관계를 잘 맺고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사람 관계라는게 틀어질 수 있잖아요. 그럴 때 감염인을 협박하거나 금품갈취하는 용도로 이 법조항이 소환되는 거죠. 나한테 뭘 해주지 않으면 고소할 거야, 보상금 얼마를 지불해, 그런 협박이요."
- HIV 감염인에 대한 비과학적인 편견이 다른 제도에도 반영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감염인은 군대도 못 가잖아요.
소주: "HIV에 감염되면 군대가 면제가 되고, 군인이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약 잘 먹고 건강상 문제가 없어도 면제를 시키는 거니까 일종의 근거없는 차별인 것이죠. 직업군인을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직업선택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군대 안 가면 좋은 거 아니냐 하는데, 군대를 안 갔다 왔다는 이유로 취업할 때나 직장에서 겪는 문제들이 있어요."
소리: "일반적으로 건강상 문제가 있어서 군대 안 가는 경우는 신체검사에서 5급을 받아요. 전시근로역에 해당이 되니까 민방위 의무는 지게 되고요. 그런데 HIV 감염인은 5급이 아니라 6급을 받기 때문에 민방위도 제외가 돼요. 6급을 받는 다른 질병은 백혈병이나 고도의 조현병처럼 겉으로 티가 나는 병이거든요. 그러면 직장 다닐 때 '너는 왜 민방위 안 가?' 이렇게 질문을 받게 되는 거예요. 매우 곤란해지고, 내가 감염인인 것이 드러날 수도 있는 상황이 되는 거죠.
저는 이번에 코로나 백신 때문에 직장에서 곤란한 일을 겪었어요. 예비군이나 민방위는 얀센을 맞았잖아요. 그런데 저는 6급이라 민방위도 면제이기 때문에 얀센을 못 맞는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의심을 갖게 되는 거예요. '쟤는 왜 얀센 안 맞지?' 하고요. 어떻게 둘러댈 것인가 고민하느라 머리가 아프죠. 감염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불안하고요."
"HIV 감염인 전용 시설이 없어서 우리 병원에선 수술 못해드립니다"
- 감염인이라는 것이 알려졌을 때 직장에서 불이익을 겪는 경우도 많을 것 같아요.
소리: "직장인 건강검진을 받으면 본인에게 직접 통보하는 게 원칙인데, 잘 지켜지지 않아서 회사에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어요. 회사에 따라서 건강검진에서 HIV도 포함해서 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포니: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된 후에 회사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직장에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가끔 있어요. 감염 여부는 직장과는 관계없는 사생활인데도 불구하고요."
소리: "감염인이라는 사실이 어떤 경로에서건 직장에 알려지면, 회사 측에서 어떻게든 그만두게 만드려고 애를 쓰는 경우들을 많이 봤어요. 대놓고 '감염인이니까 해고야' 이렇게는 안 하지만, 무슨 이유를 대서 괴롭혀서 쫓아내는 방식으로요."
- 병원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도 차별이 심하다고 알고 있어요. 어떤가요?
소리: "HIV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감염인들도 제공받지 못하다 보니까 '저 감염인인데 감기 때문에 동네 병원 가도 되나요?' 이런 문의도 저희한테 들어오거든요. 당연히 병원 가도 되죠. 그런데 감염인인 것을 알고 병원들에서 거부하는 경우가 꽤 있어요. 동네병원을 가도 되는 가벼운 질병인데 꼭 3차 종합병원을 가라고 돌려보내는 거죠.
그런데 3차 병원에 가도 차별을 해요. 시술이나 수술 같은 걸 해야 하는 상황인데 자꾸 안 해주려고 미뤄서 상태가 악화된다거나. 수술을 해야 하는데 '저희는 HIV 감염인 전용 시설이 없어서 수술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죠. 수술 받으려면 수술에 쓰인 물품들을 다 버려야 하니까 새로 사는 비용을 추가로 내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말이 안 되는 거죠. 수술하고 나면 원래 다 소독하지 않나요? 그러면 HIV가 전파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데도요."
- 이외에도 시급히 개선돼야 할 정책은 무엇이 있을까요?
포니: "학교 성교육은 HIV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 않아요. 성인들도 잘 모르고요. 심지어 당사자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감염인인데 날고기 먹어도 되나요?' 이런 옛날옛적 질문이 아직도 저희한테 들어오거든요.
학교에서 성교육할 때 HIV에 대해 다루는 방식은 '동성애 때문에 걸리는 질병이니까 너네하고는 상관없어' 이런 식이거나, HIV 감염인의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줘서 금욕을 강조하는 소재로 쓰는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성교육을 하니 감염인에 대한 혐오가 키워지고, 실제 HIV 감염을 예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소리: "그리고 감염인의 출산 등 재생산권이 실질적으로 제약되고 있는 상황도 개선이 필요해요.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는 이제 결혼과 출산은 포기해야 하는구나'라는 절망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감염인이 출산을 하더라도 약물을 통해 태아 수직감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있는데, 국내에서는 감염인의 출산을 지원하려는 병원이 없다고 알고 있어요."
질병 때문이 아니라 차별 때문에 죽는 현실
간담회에 참여한 한 사람은 "평소에는 내가 감염인인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병원에 갈 때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을 때 스스로 감염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HIV 감염인이라는 것 자체는 다른 질환을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정체성이 아닐 수 있지만, 사회적 차별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HIV 감염인'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한다는 것.
국내 HIV 이슈 중 가장 시급한 문제는 사회적 낙인의 제거와 감염인의 정신건강 지원이다. 이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원인 자체가 질병이 아니라, 말 그대로 '차별'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HIV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편견을 내재한 스스로가 감염된 것을 알게 되는 경우, 더 큰 심리적 위기에 내몰린다. 현재 시스템상으로는 HIV 양성 판정이 나오면 보건소 가서 서류 작성한 후 지정된 병원 가는 식으로 매우 건조한 절차만 거치게 되는데, 특히 감염 확인 초기에 맞춤형 심리지원과 정확한 정보제공을 하는 밀착 지원이 매우 절실한 상황이다.
간담회가 끝날 무렵, '요양병원'이 대화의 화두에 올랐다. 감염인 당사자 B씨는 "길 가다 요양병원이 보이면, 우리가 늙어서 저기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고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지금은 HIV 감염인을 받아주는 요양시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HIV 감염인 청년들은 무사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차별이 이들의 미래를 가로막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더 미루지 말자. 함께 무사히 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