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셋째와 넷째는 구글 미니를 향해 외친다.
"어케, 구글~ 요괴메카드 노래 트러죠~"
당연하게도 구글 미니는 반응이 없다. 도저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어케, 구글' 이걸 어케 알아 듣겠나. 발음의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구글'이라고 부른 다음 잠시 틈을 주는 것을 아이들은 할 줄 모른다. 일발 장전하면 다다다다다. 기다림의 미학은 이들에게 전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하염없이 부르다가 결국엔 '어케 구글이 자기 말은 안 들어 준다'며 뚱한 표정으로 도움을 청하러 온다. '어케'가 아니라 '오케이'다, 구글을 부른 다음 잠시 쉬었다 말해야 한다,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쉽지 않다. 아이의 마음은 급하고 발음은 심하게 자유롭다.
심기일전하여 다시 시도한다. 구글 미니 앞에 선 나의 미니미에게서 비장함이 감돈다. 간절함을 담아 말하고는 기다리는 눈빛이 떨린다. 결국 기대가 속상함으로 바뀐다. 아이는 속상함에 울상을 짓고 나는 그 귀여움에 미소를 짓는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란 말이 사실일 줄이야.
그 귀여움을 간직하고 싶어 동영상도 몇 번 촬영했는데 어느 날부터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게 됐다. 이제는 안타까움이 더 커진 탓이다. 목 놓아 부르짖는 아이의 부름에 구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케 구글'이 '오케이 구글'이 되어 돌아왔다. 수개월이 흐른 뒤였다. 정체성을 찾은 구글 미니는 셋째의 말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셋째의 발음이 향상된 것도 있지만, 구글을 부르고 잠시 틈을 주고 이어서 말할 줄 알게 되면서 인식률이 높아진 듯했다. 그렇게 일러 주어도 안 되던 것이 보고 듣고를 반복하며 요령이라는 이름으로 체화됐다. 아니, 간절함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장족의 발전이라며 축하해주었다.
셋째의 성공에 힘입어 넷째가 어케 구글을 연발로 외쳤다. 구글 미니가 답할 리 없다. 형 말엔 대답하면서 내 말엔 대답하지 않는다며 토라지고 만다. 요령을 알려주며 여러 번 시켜보아도 잘 되지 않자 아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 쉽지 않다. 결국, 곡이 끝날 때마다 아이를 위한 통역사가 되어 노래를 바꿔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넷째의 부름에 구글 미니가 응답했다. 이야~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저절로 박수가 쳐졌고 모두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스스로도 대단히 놀라 토끼 눈이 된 넷째는 신이 나 외쳤다.
"아빠, 어케 구글이 노래 트러 줬어요." (방긋)
그냥 해보면 되는 것을
AI가 향상된 것인지 미묘하게 발음이 정확해진 것인지 알 순 없지만 그 이후로도 구글 미니는 넷째의 말에 종종 응답해 주었다. 이제 통역 역할을 끝낸 시원섭섭함을 느끼고 있자니 어느새 커 버린 아이들이 눈에 들어 왔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일상은 매일이 시도이고 도전이었다. 매일 시도하는 것. 잘 되지 않아 그날 하루 의기소침해져도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시도했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랬다. 잘 되지 않는다고 칭얼대고 울먹이기도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잘 되지 않음에 칭얼대고 울먹였다. 무한 반복이다. 그리고 어느 날 원하는 바를 이뤘고 환희에 찬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물이 무서워 머리 감기를 주저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샤워기를 틀어 놓고 장난을 친다. 넘어질까 두려워 힘주지 못하던 발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자전거 페달을 밟고 킥보드의 속도를 높인다. 잘 되지 않아 속상하고 의기소침해지는 두려움을 매일 극복하며 이뤄낸 성취다.
매일 시도하고 끝내 이뤄내는 아이들의 모습에 힘을 얻는다. 그간 나는 무엇이 두려워 주저하고 있던 걸까. 그냥 해보면 되는 것을... 어제의 실수를, 작년의 실패를 되뇌며 발을 떼지 못했던 내 자신에게 다시 시작해보자고 다독인다.
마냥 어리고 모자랄 줄만 알았던 아이들이 오늘도 한 뼘 자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저 아이들같이 '무럭무럭' 소리가 들릴 정도의 성장은 아니더라도 내 삶의 열매가 알차게 영글었으면 좋겠다. 아이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도 떫은맛이 났던 중년의 삶이 조금씩 무르익어 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