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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로마 신학대학원 유학 중 교황 바오로 6세와 함께
 1970년 로마 신학대학원 유학 중 교황 바오로 6세와 함께
ⓒ 함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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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때인 1965년 10월 함세웅은 가톨릭대학에서 선발한 5명의 유학생 중 한 명으로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판아메리칸 항공기를 타고 도쿄와 홍콩ㆍ타이ㆍ인도를 거치는 긴 여정 끝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도착 직후 로마 우르바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로마유학은 1973년 6월 귀국할 때까지 약 8년간 계속되었다. 

로마의 신학교 제도는 학년이 없어요. 여러 학년을 섞어서 '까메라따'(camerata)라 해서 조로 나눴어요. 그리고 한국에서는 상급생과 하급생의 위계가 엄격했는데 로마 신학교는 이게 없는 거예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어요. 우리 한국인들은 이미 군대 생활과 대학을 마쳤으니 나이가 20대 중반인데, 로마의 친구들은 20살 내외에요.

그러니까 4~5년 어린 친구들이 곧바로 친구를 하자는데 이런 문화적 접속이 잘 안 되더라고요. 언어도 잘 안 통해서 답답하게 몇 달을 지냈는데요. 그 대신 말을 잘 안 하니까 지은 죄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살면 성인이 되겠다고 자처했지요. (주석 1)

국제신학교여서 세계 각국의 신학도들이 입학하였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 출신 학생들이 많았다. 까메라따는 20여 명을 하나의 조로 편성했는데 그가 속한 조의 조장은 일본인 신부였다. 그는 이미 학생이 아닌 신부의 신분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유학생들에게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고 제도나 관행이었는지 학생들의 일상을 학장에게 보고한다고 했다.

까메라따 조장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학장님한테 보고한다는 거예요. 다만 이태리 기숙사 학장님들은 한국인에 대한 신뢰가 있었어요. 우리가 언어는 부족하더라도 삶에는 충실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체로 저희 선배들도 그렇고 저도 잘 지냈습니다. 저희가 가서 허락을 청하면 늘 허락해주셨고요. (주석 2)

1968년 6월 사제 서품을 받고 석사 학위를 취득한 함세웅은 학문에 대한 의욕이 강하여 대부분의 동기생이 졸업 후 귀국하거나 다른 나라로 갔지만, 로마에 남아서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유학 생활의 연장은 편지를 통해 천주교 윤공희 서울교구장 서리 주교로부터 허락을 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사제들의 기숙사인 '베드로 꼴레지오'에서 공부하면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여기서 5년 동안 머물며 교부학(敎父學)을 전공하였다. 이는 선배 신부님들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교부학이란 고대 교회에서 교의(敎義)와 교회의 발달에 큰 공헌을 한 종교상의 훌륭한 스승과 저술가들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박사 논문 주제를 택할 때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저희 선배 신부님들이 교부학을 권해주셨어요. 성경공부는 하는 사람이 꽤 많고 또 교회사나 교회 신학을 많이 하는데 그 중간 부분을 묶어 줄 교부 역사신학자가 한국에 없으니 누군가 그것을 전공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주석 3)

그는 1973년 4월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에서 교부학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전에 꼭 가보고 싶었던 프랑스 남쪽 루르드 성지를 순례하며 남북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정성껏 기도하고, 이어 친구를 만나려고 독일에 갔다가 미국ㆍ일본을 거쳐 귀국하였다. 1973년 6월 20일, 8년 만이다. 그립던 어머니와 친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외국에서 공부할 때 조국을 살피는 안목을 키워서 돌아왔다. 

이탈리아에 가보니 그쪽 사람들은 자기 나라, 자기 지역의 성인들을 신앙생활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저는 왜 우리 교회는 우리의 선열을 신앙으로 받들어 모실 수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한국 교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전근대적인 신앙 이해 방식이 사라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런 변화의 시기에 신학을 배우고 있었던 거지요. 세상과 함께, 세상에 기초한, 세상을 껴안는 교회가 되고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 육체는 원수가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함께하는 벗이라는 것, 도마(안중근) 같은 신앙적 선구자를 교회 안에서 기억하는 것이 바로 민족과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는 올바른 신앙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석 4)


주석
1> 앞의 책, 61쪽.
2> 앞의 책, 42쪽. 
3> 앞의 책, 46쪽.
4> 이인우, <사제인생 40년 함세웅 신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함세웅, #함세웅신부, #정의의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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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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