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정의당 박형민 광주 서구의원 예비후보를 인터뷰했다. 지난 2011년부터 광주 서구 하수관거 부실시공 및 침수피해 문제 해결을 위해 싸워온 박 후보는 광주시로부터 사과와 대책 마련 약속까지 받아낸 민생문제 해결사로 통한다.
이 과정에서 박 후보가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농성·화정동 침수피해 주민대책위원회는 오체투지 시위까지 진행했다. 박 후보는 정의당 광주시당 민생팀장, 정의당 심상정 대통령 후보 민생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아래는 정의당 박형민 광주 서구의원 후보와의 일문일답.
- 정치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어린 시절, 끼니를 챙기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을 정도로 가난했어요. 중학교 때에는 행여 장학금을 못 받아 학업이 중단될까 고민해야 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밤에는 경비 일을 하며 살았어요. 외롭고 고독했지만 다행히 책이라는 좋은 친구 덕에 버텼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1987년 6월 항쟁에 참여하게 됐어요.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부끄럽고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선명해요. 이후 사회변혁을 꿈꾸며 경기도 성남으로 갔어요.
성남에서 어렵게 대형면허를 따서 최연소 성남 시내버스 기사로, 낮에는 운전하고 밤에는 활동했어요.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경기지부 모 교통지부에서 쟁의부장을 맡아 활동하며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세우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죠. 그렇게 활동하다가 수배자 신세가 됐어요.
그러다가 천주교 시설에 숨어든 적이 있었는데요. 그곳에서 뜻밖에도 세상의 또 다른 단면을 마주하게 됐어요.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흐르는 오폐수, 술에 찌든 가부장들, 폭력에 방치된 아동들, 부모로부터 버려져 시설에 수용된 아동들을 만나게 됐어요. 세상을 뒤집어도 이들의 삶은 바뀌지 않겠구나 싶었어요. 이때 느낀 것들이 자연스럽게 정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거 같아요."
- 광주 서구 하수관거 관련 활동은 어쩌다 시작하셨나요?
"저는 광주에서 가난한 이들의 이웃으로, 동네사람으로 살고 싶었어요. 한끼 식사를 구하지 못해 굶고 있는 노숙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식당을 열고 싶었어요. 그런데 2011년 10월에 제 뜻과 무관하게 임대형 민자사업(BTL) 하수관거 투쟁에 휘말렸어요. 저희 마을에서 준비 없는 무리한 하수관거 공사로 인해 지반이 침하되고 담장이 무너지고 주택 곳곳에 균열이 발생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주민대책위를 결성해 조사에 들어갔어요. 공사가 완료된 남구 주월동 주택들은 이미 난리가 났더라고요. 그래서 2011년 11월 공사 반대를 외치며 싸움을 시작했어요. 53일간 농성을 하는 등 이듬해 5월까지 싸웠죠. 이후 광주시가 급하게 저희들이 내세운 조건들을 수용하면서 공사가 재개되었고 피해가 발생하면 광주시가 배상하도록 약속 받았어요."
"실질적 배상 가능한 '침수피해 지역 배상조례' 제정할 생각"
- 광주시 측에서 왜 그렇게 서두른 건가요?
"당시 광주시는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있었어요. 이때 광주시에서 U대회 선수촌으로 쓰려고 서구 화정동에 힐스테이트 아파트를 지었는데요. 해당 아파트를 준공하기 위해서는 저희 마을을 지나는 관로 시공이 필수적이었어요.
그래서 광주시와 시공사 측이 용역까지 동원했고, 물리력으로 안 되니까 시공사 측이 김앤장 변호사들을 앞세워 저와 대책위 활동을 주도한 주민들에게 19억 원을 요구하는 내용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까지 제기했어요. 이때 한 분 두 분, 떠나시는 주민들에게 6m 맨홀을 저의 무덤으로 삼겠다고,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 침수 피해 문제는 다른 이야기인가요?
"네. 별개의 문제예요. 저는 BTL 하수관거 투쟁 과정에서 이 마을에 심각한 침수피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실감하지 못 했어요. 그러다가 2018년에 저희 집이 완전히 침수되는 피해를 겪었어요. 이틀 사이에 다섯 번이나 침수됐죠.
이게 말로 들었을 때에는 와닿지 않는데, 사진을 보면 다들 깜짝 놀라세요. 정말 심각한 문제예요. 이에 대해 광주시 측이 천재지변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광주시가 총 사업비 455억 원 규모의 '2010 극락천유역 하수관거 정비사업'을 진행하면서 E-라인 구간 공사를 누락시키는 바람에 발생한 인재예요.
그런데 종교시설이라고, 사업자등록증이 없다고, 혹은 지하라고 다양한 이유로 많은 분들이 피해 보상을 받지 못했어요. 제가 이번 선거에서 당선되면, 실질적 배상이 가능한 '침수피해 지역 배상조례'를 제정할 생각이에요.
저는 지난해 10월부터 항구적인 침수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매일 광주 서구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어요. 오늘로 196일차예요. 요새 선거운동을 하는데 어느 시민께서 거리에 선 제 모습을 50번은 본 거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 이번 선거에서 당선되신다면 이 지역에서 어떤 정책을 펼치고 싶으신가요?
"이번에 제가 출마하는 광주 서구의회 가선거구는 양동, 양3동, 농성1동, 농성2동, 화정1동, 화정2동을 포함하는 지역이에요. 저는 마을회관, 작은 도서관 등의 문화 인프라 구축은 물론 구도심의 오폐수 분리배출 관련 하수관거 정비사업, 재개발 사업 등 우리 지역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아울러 노인 일자리를 확대하고, 양동시장역 휠체어 리프트 철거 후 엘리베이터 설치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펼칠 생각이에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
- 시설 퇴소아동 자립지원 관련 활동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2004년 영암 영애원에 첫발을 디뎠어요. 보육원에 가보면 라면박스 놓고 사진 찍고 가는 정치인들을 종종 보는데 너무 싫더라고요. 그래서 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생일을 챙겨줬어요.
보통 1호실에 13명 정도 있는데, 생일 전주 일요일에 찾아가지 않고 당일날 찾아갔어요. 일주일에 세 번씩 가기도 했어요. 때로는 제 고향집이 있는 전남 보성에 초대해 다 같이 밤도 줍고, 대나무 잘라서 다육이도 심고 재미난 놀이도 했어요.
시설 퇴소아동의 자립과 관련된 일도 조금 했는데, 지난해 보건복지부에서 장관 표창을 주더라고요. 솔직히 좀 민망해요. 돌이켜보면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이 입소하고, 성인이 되어 퇴소했어요. 영애원 선생님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고요."
- 건전한 입양 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시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성남 천주교 시설에서의 경험 때문에 입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그렇게 막내 딸을 입양했는데요. 제 마음과 달리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을 느꼈어요.
그래서 입양 모임에 나가서 여러 선배 가정들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어느새 한국입양홍보회 광주전남지부장을 맡아 반편견 입양교육, 입양 자조모임 등을 진행하면서 활동하고 있더라고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보통 정치인들이 당선 이후에 국립묘지부터 가잖아요? 저도 당연히 5.18 묘역에 가겠지만, 영암 영애원에 첫 번째로 방문할까 해요. 거기가 제 지역구는 아니지만, 우리 사회 가장 취약계층 분들이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는 제 스스로의 다짐을 확인하고 싶어요.
제가 하고 싶은 정치는 영암 영애원 같은 곳들을 찾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든 소외된 이들을 만나 긴 세월 함께하는 진정성의 정치예요. 제가 이번 선거에서 광주 서구의원이 된다면, 주민 여러분들께서 지난 10년간 보신 것처럼 끌텅(나무 그루터기나 배추 뿌리 따위의 깊이 박혀 있는 부분)을 파서 지역 문제를 마침내 해결하는 정치를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