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의 집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캣맘'을 만나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이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분이 있는 근처 마을의 어르신 댁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그 '캣언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그날 그 집을 찾아간 건 할머니의 안부도 궁금했지만, 내가 이름 붙인 '앨리스'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앨리스는 부산댁 언니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 근처에서 사료를 먹고 있었다. 사료를 바쳐도 내 앞에서는 절대 먹지 않던 앨리스였는데···. 낯선 이에게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동시에 배신감도 밀려왔고, 묘한 경쟁심도 발동했다. '감히 내 구역에서···, 이 구역의 미친 집사는 나라고!'
냥이계의 전설
"앨리스!"
앨리스는 내 목소리에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사료에만 집중했다. 등만 보이던 그 사람이 고개를 획 돌려서 나를 쳐다봤다.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그녀는 '코리안 숏헤어(일명 코숏)' 중 활달하고 친화력이 좋은 '올블랙(깜장이)'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앨리스? 아! 우리 '하루'가 앨리스라고도 불렸구나."
'우리 하루? 이건 무슨 개수작이야!'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며 앨리스와 그녀를 번갈아 보고 있을 때, 어르신의 나직한 목소리가 마루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서로 인사해뿌라 마. 여는 우리집에 댕기는 요양 보호사 양반이고, 저는 고양이 밥 준다꼬 우리 마당꺼정 들어왔뿟다가 내캉(나랑) 알게 됐뿟는 노 이장이라 카이."
그녀는 활짝 웃으며 두 손으론 박수를 치면서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어, 어? 왜 저래!' 나는 엉겁결에 뒷걸음질을 치면서 한껏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우리 하루에게 사료를 주신 분이군요. 안 그래도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저는 여기 우리 어르신을 도와드리고 있는 요양 보호사 배OO이라고 해요."
우리는 마루에 걸터앉아 거의 1시간가량 얘기를 나눴는데, 대화는 이쪽이 야옹? 물으면 저쪽이 냐옹! 대답하고, 니아옹? 하면 이아옹! 하는 식이었다. 어르신은 우리 얘기가 신기한지 한 번도 끼어들지 않고 듣기만 했다.
'캣언니'를 만난 얘기를 꺼내자, 부산댁 언니는 앨리스에게 더는 사료를 안 줘도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캣언니가 앨리스에게 직접 사료를 주기 때문이었다. 덧붙여서 부산댁 언니는 캣언니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누군지 안다고 말했다.
함양 바닥에서 냥이를 좀 모신다는 사람 치고, 그녀의 명성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다는 거였다. 나는 전혀 알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역시 사람은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사방엔 은둔 고수가 수두룩하니까 말이다.
"언니, 나는 그 캣언니가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그니까, 너는 캣 타워에서만 살지 말고 영역을 좀 더 넓히라고."
부산댁 언니의 말에 따르면, 캣언니는 함양으로 오기 전에 창원에서 살았는데, 거기에서도 집사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했다고 한다. 창원에서 차에 치인 길냥이와 길멍이들의 병원비와 사료값으로 캣언니는 아파트 1채를 날렸다는 것이다.
길냥이·길멍이에게서 벗어나고자 함양으로 숨어든 지 4년, 하지만 현재 그녀가 사료를 조공하며 모시는 함양 냥이만 해도 200마리를 넘어설 거라는 부산댁 언니의 말이었다. 그런 캣언니에게 경쟁심을 느껴 이 구역의 미친 집사는 나라고 생각했다니, 내가 진짜 미친 생각을 했구나 싶었다.
"과속 방지 턱 꼭 부탁해요"
"이장님, 그러니까 여기 아래쪽은 경사가 너무 심해서 절대로 과속 방지 턱을 설치할 수 없습니다. 이건 아예 안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르신들이 가로수 밑에서 쉬는 터라 과속으로 달리는 차량 때문에 도로가 너무 위험하다고 설명했지만, 총무계장과 함께 온 군청 건설교통과 담당자는 허가가 날 수 없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더는 뭐라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과속 방지 턱 설치의 당위성에 대해 주장해야만 했다.
"여기서 로드킬 당한 고양이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어르신들이 죽은 고양이를 보면서 감정이입을 한다구요. 마치 자신이 로드킬을 당한 것처럼. 그래서 어르신들에게 이 도로는 죽음을 의미하게 되고, 도로에 나오는 걸 두려워하다 보니, 마을 어르신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쇠약해지는 거라구요. 규정도 중요하지만, 어르신들의 건강도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총무계장과 군청 담당자는 한숨을 내쉬며 서로 쳐다봤다. 두 사람은 도로를 따라 아래에서 위로 발걸음을 옮겼고, 나도 그들의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마을 회관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회관 앞에는 부산댁 언니와 어르신 2명이 어두운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그러고는 두 공무원을 향해 한마디씩 던졌다.
"과속 방지 턱 꼭 좀 부탁해요."
"무서버가꼬 나댕기질 몬 한다꼬."
"내 죽기 전에, 그게 뭐라 캤노, 와 이래 기억이 안 나노. 머 거석(거시기, 그것) 쫌 해달라꼬."
연습한 내용보다는 훨씬 약한 발언이었다. 두 공무원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세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게 아닌데, 안 해주면 마을 앞에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에 들어간다고 연습해 놓고, 이게 뭐야.' 마을 회관 위쪽으로 걸어가던 군청 담당자가 약간은 밝아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장님, 여기 이쪽은 경사도가 거의 없어서, 이 지점에는 과속 방지 턱을 설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런데요?"
"그런데 여기 이 집 바로 앞에 턱을 설치하면, 밤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다시 걷어 가라고 민원을 넣을 게 뻔하거든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여기 이 집은 집사가 사는 곳이라···."
담당 공무원이 지목한 그곳은 서울댁 언니의 집 앞이었다. 따라서 민원이 들어갈 리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이장님. 그게 뭔가 하면 이게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과속 방지 턱 설치가 타당한지 심사를 거쳐야 해서···. 아마도 3달 이상이 걸릴 수도 있어서, 죄송하지만 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그러면 저희가 건의한 아래위 두 군데 중에서 아래쪽은 아예 불가능하고, 위쪽은 심사를 통과해야만 설치를 할 수 있다는 얘긴가요?"
군청 담당자의 안색을 보니 내 얼굴 표면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알 만했다. 아마도 X이라도 씹은 표정이었을 것이다.
"심사에서 통과 못 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게, 그러니까, 그런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중간 정산만 120만 원
캣언니를 다시 만난 건 첫 만남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나서였다. 고양이 중성화 수술과 관련해서 뭘 좀 물어보려고 단골 동물병원을 찾아갔는데, 소파에 캣언니가 앉아서 직원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자기야, 봐! 만날 사람은 언젠가 어떻게든 꼭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다니까."
"안녕하세요, 캣언니!"
캣언니는 허피스(일명 고양이 감기) 때문에 항생제를 사러 왔다고 말했다. 잠시 안부를 물은 뒤 직원에게 의사와의 상담을 요청했는데, 외근 중이라 좀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야, 무슨 일이야?"
"아, 중성화 수술이 필요한 애들이 있는데, 함양군의 길고양이 중성화(TNR) 수술비 지원 사업을 통해 올해는 몇 마리나 수술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노 이장은 지금까지 몇 마리나 중성화시켰는데?"
"그러니까 2019년에 보자 19마리 그리고 작년에 22마리 정도?"
"혼자서 그렇게 많이 수술시켜 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동생이 그렇게 다 해버리니까 내가 데려온 얘들이 못 하게 된 거구만."
"그게 아니라, 우리 동네 서울댁 언니와 부산댁 언니 그리고 저까지 다 합쳐서 그렇다는···."
캣언니는 살그머니 웃었는데, 좀처럼 볼 수 없는 고양이의 미소를 닮은 표정이었다.
"어쨌든 대단해. 냥이들 '포획 틀'에 넣기도 힘들었을 텐데. 중성화 수술에 관해서는 자기가 나보다 훨씬 낫구만."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전문가로부터 칭찬을 들은 아마추어의 심정이랄까. 그때 직원이 캣언니에게 뭔가를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창원의 동물병원에 맡긴 교통사고 당한 그 길냥이는 수술비와 입원비가 얼마나 나왔어요?"
"후유! 얼마 전에 창원으로 냥이 병문안 갔다가 중간 정산으로 120만 원 냈어요."
"어떡해! 우리 병원이 수술이 되면 참 좋을 텐데. 미안해요, 선생님!"
솔직히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 이장, 이번 주말에 약속 없으면 우리집에 놀러 한번 와! 우리집에도 냥이랑 멍이랑 엄청 많거든."
"네, 토요일 오후 2시 괜찮겠지야옹?"
"당근냐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