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되다가 버려지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버려진 유기식물도 살아날 수 있을까요? 그것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믿어보며 반려식물 이야기를 시작합니다.[기자말] |
블로그에 '식집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식물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지난해 봄이었으나 기록으로 남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간의 식물들 이야기는 아쉽게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요즘 눈에 띄게 쑥쑥 자라는 식물의 모습이라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잘 자라는 식물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이 자신이 키우는 식물을 보여주며 무수히 많은 사진 속 식물들의 이름과 특성을 외는 것이 아닌가. 잎과 제형, 뿌리와 크기, 그것들이 온 경로 등을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기며 식물 키우는 재미를 톡톡히 느낀다고 했다.
거기에 분양의 맛도 짜릿하다고 했다. 희귀종으로 몸값을 톡톡히 하는 몬스테라 알보도 삽목을 통해 번식에 성공했고 자신에게로 오는 식물은 절대로 죽어나가는 일이 없다며 '식물계의 금손'이라고 공공연히 자랑하는 것도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 선생님이 올리는 나름의 수익도 부러웠지만 실패 없는 금손이라는 사실과 이웃에게 나눈다는 말에 혹했다.
이왕 키우는 거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라도 기록은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나도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주워 온 유기 식물이 살아나는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죽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물도 신경 써서 주고 식물영양제도 주며 아침저녁으로 신경을 쓴 식물이었다. 버려진 것이 살아난 이야기를 남기며 이참에 나도 '식물계 금손'으로 등극하고 싶었다.
남편이 "이걸 살릴 수 있냐"라고 물었다
부쩍 잘 크는 식물은 파키라다. 2주 전 화원에서 한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공기정화식물로도 잘 알려져 있고 손가락같이 갈라진 잎과 뿌리 윗부분 줄기의 통통한 모양새가 특이한 식물이었다. 자생지인 멕시코에서는 교목으로 자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화분에 심어 잎을 관상하는 관엽식물로 주로 키운다. 이 식물이 나에게 키우는 보람을 주었던 것이다.
유기 식물이 들어온 것은 한 달 전쯤이다. 하필 야근하고 늦게 퇴근한 그날, 집에 들어가니 남편이 조용히 화장실로 이끌었다. 화장실 세면대에 놓인 비닐봉지에는 몇 가닥 안 되는 가지 끝에 잎이 몇 개 달린 커다랗고 굵은 나뭇가지가 들어 있었다. 굵은 줄기 끝에 달린 뿌리는 뿌리랄 것도 없었다. 빈약하고 짧은 몇 가닥의 뿌리가 간신히 붙어 있었다. 뿌리도 잎도 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기형 식물 같았다.
사연인 즉, 길에 뿌리째 뽑혀 깨진 화분과 함께 나뒹구는 나무(이름을 찾아보니 해피트리였다)가 남편의 눈에 들어왔고, 혹시라도 살릴 수 있을까 싶어 가져왔다고 했다. 뿌리나 줄기가 마르지 않도록 물에 담가 놓았다며 살릴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제 식물을 키운 지 1년 차, 식집사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사람이 알 턱이 있을까마는 남편이 가져온 것을 타박할 수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무작정 화분을 준비해서 마사토를 깔고 분갈이 흙을 소복이 덮어 간신히 화분 모양새를 만들어 놓으니 밤 11시가 지나고 있었다.
식물을 키우고 달라진 것
블로그에 처음 식물 일기를 쓰며 스스로 식집사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집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아직은 너무 어설프고 화분도 몇 안 되지만, 우리는 매주 화분을 보러 화원에 가고 매주 식물원에 간다. 식물의 이름을 알아가고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과 기쁨을 느낀다. 마음만큼은 이미 식집사로 살고 있는 셈이다. 마음이 있으니 눈에 보이는 것도 달라지고 가족인 양 자식인 양 마음과 정성을 쏟는 중이다.
현재는 화분이 하나둘 늘며 크기도 1m가 훌쩍 넘는 것부터 작은 것까지 종류가 20여 종이 넘었다. 주먹구구식으로 매일 보고 살피고 말을 건네지만 여전히 초보, 이제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적당한 때에 맞춰 분갈이도 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토분도 미리 준비해 두었고, 분갈이용 흙과 마사토, 펄라이트와 식물 영양제도 준비해 두었다.
식물을 키우니 화원은 물론이고 길거리에 놓인 작은 화분도 그냥 지나치게 않게 된다. 이름과 크기와 생육 정도와 영양 상태까지 전문가라도 되는 양 점검하고 나홀로 훈수를 둔다. 주인의 손길이 닿아 잘 관리되는 것들은 잎들이 윤기가 나고 빛을 발하지만, 버려진 듯 방치된 식물은 그들의 타들어 가는 잎에서 고스란히 아픔이 전해진다.
돌아보니 작년 봄, 남편의 암 진단과 함께 식물 키우기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키우고 죽이기를 반복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새삼스럽게 용기를 낸 이유가 남편의 암 진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이었는지도. 하나로 시작해서 스무 개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 키우는 순간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고, 잎을 닦고 가지를 다듬고 물 주고 틈틈이 창문 열고 닫고 하며 바삐 움직이는 손과 발이 여타의 잡념을 지워 주는 것 같았다.
어딘가로 마음을 쓰는 것이 사치로 느껴지던 순간이었지만, 식물과 함께는 괜찮았던 것 같다. 조금씩 실내 환경도 좋아지는 것 같았고, 그들이 성성한 생명력에 남편도 나도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새잎이 올라온 것을 목격한 아침이면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열심히 마음을 쏟으면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주었던 것 같다.
시작이 어떤 목적이었건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이른바 '원예치료'의 종류는 아닐까 싶다. '원예치료'는 식물과 원예 작업, 정원 조경 등 치유적 목적을 지닌 활동을 말한다. 사소하면서도 사소하지 않은 마음의 병과, 환절기만 되면 비염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을 약에서 해방시킬 수 있기를 기대해 보기도 한다.
지난주에는 '막실라리아' 화분을 들여왔다. 초콜릿 향 같기도 하고 헤이즐넛 커피 향도 나는 화분이 지금 우리 집안을 향기롭게 하고 있다. 특히 나에게는 향기가 주는 효과가 큰 것 같다. 식물을 돌보며 식물들이 뿜어내는 향기와 자연의 냄새에 조급하고 우울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유기 식물이 며칠 전 새 싹을 틔웠다
한 달 전 들어온 유기 식물 해피트리가 며칠 전 새 싹을 틔웠다.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뿌리를 확인한다면 아마도 잎보다 더 튼튼하고 단단하게 발을 쭉 뻗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거리의 말라비틀어져 가는 식물들을 보면 살릴 수 있을까 가늠해 보기도 한다. 그것들이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 내 정성보다는 식물의 타고난 생명력을 믿고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동한다.
최근 계양구 가로수 학살 사건을 접하며(관련 기사 :
이재명 잘못 아닌데... 계양구 가로수 학살, 내가 보았다) 조경이 식물을 살리고 잘 키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지자체에 지원되는 예산 때문에 죽이고 버려진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고 기가 막혔다. 국가의 예산이 어이없이 버려지는 것도 속상했지만, 멀쩡한 생명을 죽여버리는 일, 이것이 동물이라면 생각만으로도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싶어 화가 났다.
물론 지난 1년간 나에게도 실패는 있었다. 로즈메리와 스파티필름은 과습으로 죽었고, 튤립도 화려한 꽃이 지니 잎도 시들해져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실패의 경험이 더 많은 생명을 키우는 발판이 될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또 앞으로는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많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죽이든 살리든 모든 전제는 최선을 다해 키우자는 것이다.
오늘도 식물과 눈을 마주치며 아침인사를 했다. 사람이건 식물이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면 사랑이 싹튼다. 나태주 시인의 시 <꽃>에서처럼 나도 식물과 사랑에 빠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