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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천 황현 선생 생가에서 동아리 아이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매천 황현 선생 생가에서 동아리 아이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 서부원
 
전남 광양과 구례에는 매천로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도로가 있다. 광양의 매천로는 읍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심도로이고, 구례의 매천로는 읍내에서 지리산 성삼재로 오르는 간선도로다. 구한말 애국지사 매천 황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황현은 1855년 광양에서 태어나 서른두 해를 산 뒤, 인근 구례로 이사해 1910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과 더불어 구한말 3대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셋 모두 시문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쪽 같은 품성으로 당대 명성이 자자했다.

다만, 스승이자 친구로서 평생 교유한 이건창과 김택영은 짧게나마 벼슬길에 올랐지만, 황현은 단 한 번도 국록을 먹은 적이 없다.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부패한 현실에 절망하여 관직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냈다. 시골의 선비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만 매진했다.

후대 역사가들이 그의 삶을 기리는 건, 온갖 부정과 탐욕이 횡행하던 당시 지행합일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보여준 드문 사례여서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그는 자결로써 지식인의 소명을 일깨워주었다. 그가 남긴 절명시와 유서는 당대 권세가를 향한 죽비소리였다.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이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을 하기 힘들다는 뜻의 시구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을 애통해하며 자결로써 대신 속죄한 그의 삶은 유교적 명분론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조선 성리학은 그에게 빚졌다.

황현 유적지에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는 이유 
 
 황현의 묘소가 자리한 매천 유적공원은 웃자란 잡풀더미에 봉분 앞 상석조차 덮일 정도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황현의 묘소가 자리한 매천 유적공원은 웃자란 잡풀더미에 봉분 앞 상석조차 덮일 정도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 서부원
 
지방선거를 사흘 앞둔 지난 주말, 황현의 삶을 좇아 역사 동아리 아이들과 답사에 나섰다. 몇몇은 <매천야록>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그의 이름을 낯설어했다. 알다시피, <매천야록>은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국권 피탈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더없이 귀중한 책이다.

구한말을 다룬 교과서의 서술이 상당 부분 <매천야록>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이따금 수능에 출제되어 책 이름만 대충 들어 알고 있을 뿐이다. 진도에 쫓기는 수업이 늘 그렇듯, 황현과 <매천야록>은 일대일 대응의 수학 공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의 생가와 묘소는 광양에 있고, 그가 후학 양성을 위해 세운 학교와 그를 배향한 사당은 구례에 있다. 사당인 매천사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국에 그를 모신 사당은 오직 이곳뿐이다. 황현은 전남 광양과 구례를 동시에 대표하는 역사 인물이다.

생가에는 해설사가 상주한다. 생가의 한쪽 방을 사무실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방 안에 모셔진 황현의 초상화가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그의 초상화는 현재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초상화를 등진 채 툇마루에 앉아 해설사의 설명을 듣게 된다.

안타깝게도 찾아갈 만한 황현 유적지는 생가가 사실상 전부다. 다른 유적지는 해설사는커녕 출입문이 굳게 잠겨있거나 방치된 채 잡풀만 무성하다. 당장 생가로부터 500미터쯤 떨어진 매천 유적공원은 웃자란 풀숲에 가려 새뜻하게 세워놓은 수많은 기념물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매천 유적공원은 황현 자신은 물론, 조부와 아들까지 나란히 모셔놓은 가족 묘원이다. 넓은 주차장에다 정자와 인공 연못까지 꾸며놓았지만,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 모양새다. 잡풀에 덮인 묘소 주변을 서성이던 아이들은 당장이라도 뱀이 튀어나올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중화장실은 배수관이 막혀 분뇨가 넘친 상태라 도저히 사용할 수 없다. 무더운 날씨에 파리떼가 꼬여 사용은커녕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다. 황현 묘소 앞 돌 반 풀 반의 계단에 서서 단체 사진을 찍은 뒤 도망치듯 유적공원을 빠져나왔다. 매천로라는 길 이름이 참으로 민망했다.

구례에 자리한 유적지는 한술 더 뜬 상황이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가는 곳마다 아예 들어갈 수 없도록 어른 주먹만 한 자물쇠로 문을 걸어 잠가놓았다. 그가 벼슬길을 마다하고 낙향해 후학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호양학교도, 그를 배향한 매천사도 담장 너머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호양학교의 정문 앞은 대형버스 서너 대쯤은 족히 주차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아스팔트로 새뜻하게 포장해놓은 걸로 보아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을 위한 배려인 듯하다. 그러나 당일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고,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어 유난히 황량하게 느껴졌다.

굳게 닫힌 문 앞을 서성이노라니 촌로 한 분이 다가와 항상 잠겨있는 곳이라며 귀띔해주셨다. 1년 365일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하셨다. 더욱이 아이들이 단체로 찾아온 건 난생처음이라고 놀라워하셨다. 그분도 호양서원이 어떤 곳인지, 황현이 누구인지 모르고 계셨다.

'구례사립호양학교(求禮私立壺陽學校)'라고 새겨놓은 현판만 새것일 뿐, 담장 너머 학교 건물은 언뜻 보기에도 퇴락한 채 을씨년스럽다. 인적 끊겨 생기 잃은 유적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자물쇠를 채워놓아 드물게 찾아오는 이들까지 막아서고 있으니 아연할 따름이다.

생가만큼이나 중요한 유적인 매천사만큼은 열려있을 줄 알았다. 오래전이지만 이곳을 찾아올 때마다 잠겨있었던 때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자동차로 지리산 성삼재를 오를 때마다 도로에 인접한 이곳을 휴게소 찾듯 들렀다. 몇 해 전 사당 내에 유물전시관까지 세워놓은 상태다.
 
 황현을 배향한 매천사는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다. 개방해달라고 담당자에 전화를 걸었더니 주말이라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황현을 배향한 매천사는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다. 개방해달라고 담당자에 전화를 걸었더니 주말이라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 서부원
 
다행히 입구에 개방을 원하면 전화해달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의 담당 부서로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이 되질 않았다. 이어 아래에 적힌 관광안내소로 전화를 걸었으나 마찬가지였다. 애꿎은 마스크를 철저히 착용하라는 방역지침만 연거푸 소개될 뿐이었다.

아이들과 교대로 50번쯤 통화를 시도했을까. 가까스로 담당자와 연결이 됐다. 열쇠를 군청에서 보관하고 있기에 문을 열어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주중에는 담당자가 출근하기 때문에 가능한데 주말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거다. 

주중에 이곳을 찾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결국 찾아간 곳마다 입구 주변만 배회하다 돌아왔다. 어차피 들어가지도 못할 유적지를 굳이 찾아갈 게 아니라 매천로라는 도로명의 의미만 설명하고 돌아올 걸 그랬다. 황현의 애국 충절을 기린다면서 유적지마다 문을 잠가놓은 현실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돌아오는 길, 도로변에는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의 공약을 적은 현수막들로 가득하다. 그중 유독 눈길을 잡아끄는 내용이 있다. '관광 문화 산업의 육성', '관광 문화 도시의 건설'. 과연 저들이 내세우는 관광 문화란 무엇일까. 지역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이라는 황현의 유적지조차 방치한 상태에서 대관절 뭘 육성하고 건설한다는 뜻일까.

#매천 황현#매천로#매천사#호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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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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