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고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민주시민장이 광주광역시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엄수됐다. 정 이사장은 지난 29일 오전 광주 남구 진월동에서 심장마비 증세를 보여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운명했다.
고 정동년 이사장의 삶은 '민주화 여정' 그 자체였다. 1960년 4.19혁명에 참여한 그는 전남대학교 화학과에 진학한 뒤, 1964년 제4대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됐다. 그러나 이듬해 한일굴욕외교 반대시위를 주도해 학교에서 제적됐다. 이후 정 이사장은 서울에서 친형과 함께 10여 년간 양복점을 운영한 후 전남 나주로 내려와 기술학원 강사 등으로 활동했다. 그 사이 부인인 이명자 여사, 두 아이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정 이사장은 1980년 '서울의 봄'이 온 덕에 15년 만에 복학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전남대 복적생 대표로 민주화 여정에 참여한다. 그해 4월에는 강연을 요청하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 동교동 자택을 방문했지만 김 전 대통령을 만나지 못해 방명록에 이름만 남기고 돌아왔다.
1980년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정동년은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예비검속으로 구속됐다. 이후 신군부는 전남대 복적생 대표 정동년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수괴로 지목했다. 신군부는 정동년이 김대중의 지시를 받아, 5.18민주화운동을 배후조종했다고 발표했다.
"김대중은 전남대 복학생인 정동년이 김대중가(家)를 방문하였을 때 광주지역 대학생 데모 현황을 논의한 후 500만 원의 자금을 주면서 자신의 서적과 선동 문건 등을 전남대, 조선대에 배포하고 대정부 투쟁을 전개할 것을 교사·선동하였다. 정동년은 김대중의 지시에 따라 광주에 내려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 270만 원을 조선대 데모책 윤한봉에게 170만 원을 주어 광주사태의 발단을 이루었던 전남대 가두시위를 배후 조종하였다."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수사결과
정동년은 상무대 영창에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문을 겪은 직후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80년 10월 25일, 계엄보통군법회의가 5.18 관련자들에 대한 1심 선고를 내놓았다. 군 재판부는 정동년, 김종배, 박남선, 배용주, 박노정 등 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항소심에 해당하는 계엄고등군법회의는 김종배, 박남선을 제외한 3명에게 사형을 판결했다.
1981년 3월 31일, 대법원이 계엄고등군법회의가 정동년, 배용주, 박노정에게 선고한 '사형' 판결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가족의 사형 선고 소식을 확인한 5.18구속자 가족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명동성당에서 단식·점거 농성을 진행했다. 정동년 이사장의 부인 이명자 여사 역시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81년 4월 3일, 구속자 가족들의 저항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전두환이 5.18 사형수 세 사람에게 선고된 '사형'을 '무기징역형'으로 감형했다. 이후 5.18구속자들은 차례로 감형된 후 풀려났다. 정동년은 1982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됐다. 그러나 그의 민주화운동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정동년은 이후 5.18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 등을 역임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1988년 국회청문회에 출석한 정동년 이사장은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본인의 무죄를 증명하거나 광주 시민들의 아픈 상처,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을 얘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광주시민들의 피맺힌 절규를 국민에게 전달하려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라고 운을 뗀 후 신군부의 고문 행위를 폭로했다.
지난 1965년 한일굴욕외교 반대시위로 옥고를 치렀던 정 이사장은 5.18민주화운동으로 두 번째 옥고를 치른 후에도 두 차례 더 옥고를 치렀다. 지난 1986년 5.3인천항쟁에 연루돼 세 번째 옥고를 치렀고, 지난 1988년 조선대 교지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이철규 열사 의문사와 관련해 진상규명 활동을 하던 중 네 번째 옥고를 치렀다.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이지현(예명 이세상) 전 5.18부상자동지회 초대회장은 "당신이 필요한 곳에는 꼭 계셨던 분이셨다. 지난 1995년에 5.18특별법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모으고 명동성당 앞 시위를 진행하고 100만 인 서명운동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큰 역할을 하셨다"고 회고했다.
매년 금남로에서 5.18전야제가 열리게 된 과정에도 고인의 역할이 컸다는 후문이다.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김도일 교수는 "지난 1990년 초에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대표로 계셨던 정동년 선배를 충장로 국본 사무실에서 만났다. 당시 정 선배가 5.18민중항쟁 전야제를 금남로에서 치르자고 제안하셔서, 예산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며 "당시 극단 '신명'에서 기획·연출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그해 5.18전야제는 전일빌딩 앞에 드럼통에 베니어판을 깐 무대에서 치러졌고, 5월 영령을 추념하며 5월정신 계승을 되새기는 노래, 춤, 시 낭송 등이 진행됐다. 당시 유동사거리까지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모였던 걸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김도일 교수는 "금남로에서 진행된 최초의 5.18전야제는 정동년 선배의 지원과 후광에 미술, 문학, 연극, 노래 등 다양한 지역 문화운동이 결합함에 따라 가능했다"며 "많은 분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5.18전야제는 1988년 5월 17일 광주 구동 실내체육관에서 처음으로 개최됐다. 이후 1990년에 처음으로 금남로에서 치러졌으며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예산을 지원했다.
31일, 국가보훈처 국립묘지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29일 별세한 5․18민주화운동부상자 고 정동년님에 대한 국립묘지 안장대상심의를 진행한 결과, 고인을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날, '5.18사형수' 출신으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등에 힘써온 정동년 이사장은 평생 민주화운동을 함께해 온 동지들이 묻혀있는 국립 5.18민주묘역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