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지방선거를 치르는 딸과 선거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우선 딸은 왜 투표용지가 7장이나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첫째, 과연 후보를 다 알고 확인하고 찍는 거냐고 반문했다. 둘째, 구의원을 구에서 뽑는 것은 이해 가는데, 왜 시의원도 구에서 뽑는 것인지 의아해 했다.
"시의원은 시 단위에서 뽑아야 하지 않나요?" 나는 대답했다. "맞아. 국회의원도 국가 단위에서 뽑아야 되는 것이 아닐까?"
셋째, 왜 파란색 당 후보는 다 1번이고 빨간색 당 후보는 다 2번인지 의아해 했다. 그 기호가 국회의원 숫자 순위라는 것을 알려주자 어이 없어했다.
"왜 지방선거를 하는데 국회의원 등수로 번호를 붙이죠?"
딸의 궁금증은 끝이 없었다. '1-가', '1-나'처럼 기호 뒤에 붙은 가, 나의 의미를 알고 나서 또 물었다. "사람들이 자기 지역구에서 몇 명을 뽑는지 다 알고 투표하는 걸까요?" 나는 "글쎄다"고 답했다. "투표용지 위에 'OO구 O선거구는 3명의 의원을 선출합니다' 뭐 이렇게 표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선관위에서 진즉에 던졌어야 했을 질문을 딸이 하고 있었다. "그럼 3인 선거구는 3명을 찍는 것인가요?" 모든 투표용지에는 한 곳만 표기해야 한다고 대답하고 나서 나도 궁금해졌다. 기초의원 선거를 마친 유권자 중에 국회의원과 광역의원과 달리 기초의원은 2명 이상을 뽑는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투표한 사람이 몇 %일까? 그냥 1명 뽑는다고 알고 1명을 찍은 것은 아닐까?
처음으로 지방선거를 치르는 딸과의 대화
처음으로 지방선거를 치르는 딸과의 대화는 유익했다. 지금의 선거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제9회 동시지방선거가 6월 1일 끝났다. 예상대로 투표율(전국 평균 50.9%)은 매우 낮았고 지역주의 정치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으며 거대 양당 독식의 구조는 그대로였다. 지선은 대선의 연장이었다.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는 몇몇 지역의 예외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미미했다.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진보정당들이 무기력하고 믿음을 주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기호1번과 기호2번 정당은 대부분 선거기탁금을 돌려받고, 유세차와 공보물과 플래카드와 명함, 유급선거운동원 비용까지 거의 국민 세금으로 충당하는 반면에, 진보정당들은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쌈짓돈을 모아 선거를 치르고 기탁금조차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공직선거법 '제57조(기탁금의 반환 등)'에 따르면 득표율이 15%가 넘으면 기탁금 전액을, 10-15%면 기탁금 반액을 반환해 주게 되어 있다. 또한 공직선거법 '제122조의2(선거비용의 보전 등)'에 따르면 역시 득표율이 15%가 넘으면 선거비용 전액을, 10-15%면 선거비용 반액을 지자체 부담으로 보전해 주게 되어 있다. 이 두 조항은 거대 정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편파적 제도이다. 부자 정당들은 국민 돈으로 선거를 치르고 가난한 정당들은 자기 돈으로 선거를 치르니 이것은 애초부터 게임이 될 수 없는 선거인 것이다. 거대 양당은 이 제도를 소수정당의 '난립'을 막고 정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묻고 싶다. 그래서 두 정당이 주물러 온 대한민국 정치는 안정되었는가? 17개 '원내' 정당이 '난립'하는 네덜란드 정치는 불안정해서 무너지고 있는가?
4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장애인과 39세 이하 후보의 기탁금 반환 기준이 각각 5%씩 하향되었다. 10%면 전액, 5%면 반액 반환이 된다. 청년 후보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진보정당들은 쾌재를 불렀다. 왠일로 거대 양당이 진보정당에 유리한 법을 통과시켜 준다냐? 그렇게 생각했다면 또 속은 것이다. 이것은 기탁금 반환에 대한 것일 뿐 선거비용 보전과는 무관하다. 기탁금도 부담이 되지만, 기탁금의 크기는 선거비용에 비하면 매우 작은 액수이다. 생색도 이런 생색이 있을 수 있을까? 거대 양당은 이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켜 놓고 "청년의 정치 참여가 확대"될 것이라 자화자찬했다. 제도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도외시하고, 결과만을 놓고 진보정당이 무기력하다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비판이다.
다시 딸과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대한민국 선거에 처음으로 입문하는 사람이 보기에 국회의원도 구에서 뽑고, 시의원도 구에서 뽑고, 구의원도 구에서 뽑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현재의 지역구 선거제도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의 방증이다. 시의원은 시 단위 비례대표제로 뽑고, 구의원은 구 단위 비례대표제로 뽑는다면 누구나 이해 가능한 간명한 선거제도가 될 것이다. 정당만 찍는 비례대표제가 싫다면 '후보에 투표하는 비례대표제'(open-lis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개방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면 된다. 유권자는 후보에게 투표하고, 후보가 받은 표를 소속정당별로 집계하여 정당 득표율에 따라 전체 의석을 정당에 배분하고, 표를 많이 받은 후보 순으로 당선자를 정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장-시의원-구청-구의원, 혹은 도지사-도의원-시장-시의원의 투표로 투표용지 갯수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지방의회 선거에 대해 국민들은 말한다. 시장(도지사) 말고는 누가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이런 상황일수록 1번이나 2번의 기호를 받고 맨 앞에 위치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이득이 된다. 이른바 '초두효과'다. 일본처럼 후보의 이름을 직접 쓰게 하는 것은 단점이 없지 않지만 유권자가 어쨌든 후보와 정당을 인지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부여한다. 현재 교육감 선거에는 '교호순번제'가 실시되고 있다. 모든 후보는 선거 용지마다 골고루 위치가 배정되어 위치에 따른 유불리가 없다. 교호순번제를 도입한 취지는 '투표용지 순서 효과'를 배제하여 '공정한' 선거 결과를 담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대한민국의 다른 모든 선거는 '불공정'하다는 말과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기 독재를 위해 '3선 개헌'을 하면서 선거법에 도입한 정당 의석수에 따른 기호제는 이제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중대선거구제 시범실시, '기회의 땅'이 됐을까
대선 직전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갑자기 발표한 '국민통합 정치개혁안'은 세 가지 내용이었다. 그중 4인 선거구 분할 조항은 4월 15일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에서 삭제되었다. 그런데도 지역에서는 법률 개정을 비웃기나 하듯이 버젓이 법을 어기고 4인 선거구를 싹둑싹둑 잘랐다. 대구광역시는 4인 선거구 6곳을 모두 2인 선거구로 분할했고 부산광역시는 10곳 중 9곳의 4인 선거구를 분할했다. 둘째, 위성정당 방지법은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초의원 지역구 최소 정수를 2인에서 3인으로 바꾼다는 제안은 "기초의원 중대선거구제 확대 도입의 효과 검증을 위하여 국회의원 선거구 기준 11개 선거구 내"에서 "3인 이상 5인 이하" 선거구제를 시범실시한다는 내용으로 통과되었다. 선거구를 '시범실시' 한다는 이 해괴망칙한 법률 부칙은 이번 선거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3-5인 중대선거구제를 시범 실시한 기초의원 지역구는 전국 총 30개였다. 일단 그 중 서울 서초구 가/나, 서울 강서구 라, 경기 구리시 가/나, 충남 계룡시 가/나, 충남 논산시 나, 대구 수성구 바, 인천 동구 나, 인천 미추홀구 나, 충남 금산군 나 등 12개 선거구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을 제외한, 무소속이 아닌 제3당 출마자가 없었다. 거대 양당이 짧은 시기에 자의적으로 정한 시범 실시 지역구에, 당력이 약한 제3정당들이 갑자기 후보를 내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거대 양당이 진보정당들의 활동이 활발한 곳을 특별히 시범 실시 지역구로 선정해 줄 리도 없다. 예컨대 서울시 서초구 가 선거구는 4인 선거구가 되었지만 지역의 특성상 갑자기 진보정당이 출마하기 어려웠다. 결국 국민의힘 3명, 더불어민주당 2명, 무소속 1명이 출마했고, 국민의힘 3명과 더불어민주당 1명이 당선되었다. 4인 선거구제는 서초구에서 약한 더불어민주당을 위한 제도가 된 셈이다.
시범 실시 선거구에서 실제로 제3당이 후보를 낸 기초의원 선거구는 다음과 같다. 서울 성북구 가(5) 나(5), 서울 동대문구 마(4) 바(5), 서울 강서구 마(4), 경기 용인시 차(3) 카(4), 경기 남양주시 바(3) 사(5) , 광주 광산구 다(3) 라(3) 마(3), 대구 수성구 마(5), 인천 동구 가(4), 인천 미추홀구 가(3), 충남 금산군 가(3), 충남 논산시 가(5) 다(3) 등 18곳이다. 과연 3-5인 중대선거구제는 진보정당 등 제3의 정당에게 기회의 땅이 되었는가?
성북구 가선거구는 더불어민주당에서 3명, 국민의힘에서 3명이 출마하여, 더불어민주당 3명과 국민의힘 2명이 당선되었다. 정의당 후보가 출마했지만 거대 양당의 복수공천에 맥을 못췄다. 성북구 나선거구 역시 양당에서 각각 3명씩 출마해서 역시 더불어민주당 3명, 국민의힘 2명이 당선되었다. 진보당 후보가 출마했지만 역시 당선권과는 멀었다. 동대문구도 상황은 비슷했다. 마선거구는 민주당 2명, 국민의힘 3명이 출마하여 두 정당이 사이좋게 2명씩 당선시켰고 진보당 후보는 낙선했다. 바선거구는 민주당 3명, 국민의힘 3명이 출마하여 민주당 3명, 국민의힘 2명이 당선되고 정의당 후보는 낙선했다.
시범 실시된 30개 기초의회 지역구에서 제3의 정당이 당선된 곳은 광주와 인천의 딱 4곳이다. 광주 광산구 다 선거구에서 진보당, 라 선거구에서 진보당, 마 선거구에서 정의당 후보가 각각 당선되었고, 인천 동구 가 선거구에서는 정의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 4곳의 진보정당 당선에 중대선거구제 시범 실시가 실제로 도움을 주었는가? 광주 광산구 다, 라, 마 선거구는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4, 2, 2 선거구였는데 선거구 재편성을 통해 이번에 3, 3, 3 선거구가 되었다. 라 선거구와 마 선거구는 4년 전에 모두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2명씩 당선된 곳이었는데, 이번에 진보당, 정의당 후보가 각각 당선되었다. 특히 마 선거구의 정의당 후보는 3등 당선이므로 시범 실시가 아니었다면 당선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광산구 다 선거구는 조금 다르다. 4년 전에 정의당 후보가 민중당(진보당 전신) 후보를 근소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는데, 이번에는 4년 전 낙선했던 진보당 후보가 당선되고 그때 당선되었던 정의당 후보가 낙선했다. 당선된 진보정당과 후보가 교체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4년 전처럼 여기가 4인 선거구였다면 정의당 후보는 4등으로 당선되었을 것이므로 오히려 시범 실시로 된서리를 맞은 셈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천시 동구는 4년 전에 2인 선거구인 가, 나, 다 선거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선거구 재편성을 통해 가(4), 나(3)로 선거를 치렀다. 4년 전에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선)이 사이좋게 3석씩 나눠 가졌는데, 이번에는 국민의힘 4, 더불어민주당 2, 정의당 1로 재편되었다.
선거제도 개혁 없으면 거대 정당 아귀다툼 못 벗어나
정리하자면 중대선거구를 시범 실시한 30개 기초의회 지역구 중에 선거구 의원 정수 변경을 통해 진보정당이 이득을 본 곳은 광주 광산구 두 곳과 인천시 동구 한 곳 등 3곳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딱 10%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광주는 원래 진보당이, 인천은 원래 정의당이 강한 지역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 결과는 더욱 왜소하게 느껴진다. 중대선거구제 시범실시가 진보정당 등 제3당의 약진으로 귀결되지 못한 것은 소수정당의 역량 문제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거대 양당의 무자비한 '복수공천'의 위력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충남 논산시 가 선거구(5)는 무려 더불어민주당 5명, 국민의힘 4명, 정의당 1명이 출마하여 더불어민주당 3명과 국민의힘 2명이 당선되었다.
이번 중대선거구제 시범 실시는 복수공천 무제한적 허용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도록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1인 선거구를 2-4인 선거구로, 3-5인 선거구로 바꾼다 하더라도 거대 양당이 이렇게 복수공천을 계속한다면, 결과는 늘 그렇듯이 '비례성의 난폭한 유린'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복수공천의 금지가 올바른 해결책일까? 만약에 어떤 5인 선거구에 복수공천이 금지된다면 5개 정당이 사이좋게 1명씩의 당선자를 낼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다른 각도에서의 '비례성의 유린'이라 말해야 한다. 이 5개 정당의 지지도가 각각 20%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은 '복수공천이 있는 중대선거구제'도 '복수공천이 없는 중대선거구제'도 아니다. 중대선거구제는 소선거구제나 2인 선거구제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그 우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응당 정당의 지지도에 따라 의석을 비례성 있게 배분하는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야말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정도이다. 다당제 정치개혁은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다. 다양한 정치적 의사를 반영하는 다양한 정당들의 활동을 가능하게 할 선거제도의 정비 없이는 우리나라는 영원히 거대 정당의 아귀다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찬휘씨는 선거제도개혁연대 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