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53년 4월 창간된 『사상계』의 겉표지
1953년 4월 창간된 『사상계』의 겉표지 ⓒ 장준하기념사업회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발표한 담시 '오적'은 박정희 정권과 민주세력 간에 목숨을 건 대투쟁의 발화점이자 철권통치에 저항하는 실천정신의 상징이었다.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ㆍ차관, 장성 등 당대의 지배계층을 장악하고 있던 주류들의 타락과 부패상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이 시는 유신에 반대하는 반체제 전선 최초의 불꽃이었다.

이 시로 인해 김지하는 반공법 위반으로 1970년 6월 20일에 구속됐다가 9월 8일 보석으로 석방되는데 이는 박정희가 군 내부의 친위 쿠데타로 쓰러질 때까지 장장 20여 년에 걸쳐 계속된 민주 대 반민주, 독재 대 반독재 투쟁의 서곡이었다. (주석 6)

무명의 청년 시인 김지하를 일약 저항의 상징으로 만든 '오적' 필화사건은 배경이 있다. 당시 <사상계>는 창간사주 장준하가 국회의원 겸직금지로 언론인 부완혁이 맡아서 발행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광고를 싣지 못하고 서점에서는 압력으로 판매를 하지 않아 지극히 경영이 어려운 상태였다. 편집장 김승균이 알고 지내던 김지하에게 '오적'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원고를 청탁했다. 
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 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
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 ⓒ 작가회의
 
<사상계> 1970년 5월호 주제를 5.16쿠데타로 잡은 김승균은 1970년 3월 초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김지하에게 '오적촌'이라 불리던 동ㆍ서빙고동에 관한 장시를 청탁한다. '구악(舊惡)을 청산하겠다'던 쿠데타 세력이 오히려 신악(新惡)으로 등장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김지하가 이를 수락하고 얼마 후 원고를 가져왔지만 우여곡절의 시작일 뿐이었다.

먼저 풀어야 할 숙제는 잡지사 내부에 있을지 모를 반발. 김승균은 "원고를 읽어보고 매우 만족했지만 읽어보지 않은 것처럼 부완혁 사장 책상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김승균은 이미 학생운동으로 두 번 투옥된 경력이 있었던 만큼 '또 무슨 일을 꾸민다'고 의심을 받을지 몰랐고, 자신이 먼저 읽어보고 칭찬하면 글에 관한 한 자부심이 강한 부완혁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김지하와도 처음 만난 것처럼 행세했다.

"점심을 먹고 와보니 부 사장이 원고를 보며 킬킬대고 있더군요. 속으로 '됐구나' 생각했어요."

두 번째는 인쇄상의 어려움, 김지하는 오적이 짐승에 가깝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평소 잘 쓰이지 않는 한자들을 많이 썼다. 인쇄소에 필요한 활자가 없어 기존 활자를 쪼갠 뒤 조합해서 찍어야 했다. (주석 7)

일반에게 '5적(五賊)'은 1905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제에 넘기는 을사늑약에 찬성한 이완용ㆍ이근택ㆍ이지용ㆍ민명기ㆍ권중현이 연상되는 치욕적인 집단명사다. 김지하는 1970년 박정희 정권의 재벌ㆍ국회의원ㆍ고급공무원ㆍ장성ㆍ장차관은 5적이라 일컫고, 신랄한 야유와 풍자로 담시 <오적>을 3일만에 지었다. 어릴적 외할아버지가 "글을 쓰려거든 똑 이렇게 써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했던 것일까. 시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럈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모울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
 옛날도 먼옛날 상달 초사흣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이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시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상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주석 8)


주석
6> 유시춘 외, <70ㆍ80 실록 민주화운동(1)-우리 강물이 되어>, 220쪽, 경향신문, 2005.(이후 <강물이 되어> 표기)
7> 앞의 책, 47쪽. 
8> 김지하, <김지하 담시 모음집 오적>, 19~20쪽, 동광출판사, 1985,(이후 <오적> 표기)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지하#시인김지하평전#김지하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독재타도에 성공한 4월혁명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