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통치수법이 교활해진다.
<오적>시는 독재자와 이른바 '오적들'의 속이 부글부글 타올랐겠지만 비교적 '조용히' 처리했다. <사상계>를 더 이상 시판하지 않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했다. 사건이 널리 알려져서 이득될 게 없다는 계산이었다.
<사상계>가 배포되자 김계원 정보부장도 박대통령도 크게 놀랐다. 중정요원을 시켜 소리없이 책방마다 돌며 <사상계>를 거두도록 했다.
김계원씨의 말.
"문제의 시라는 걸 읽는 순간 경악했고 김지하는 참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그 충격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한자까지 갖다 붙여가면 썼는지…"
박대통령은 대로했고 청와대 주변에서는 "고약한 김지하란 놈을 당장 반공법으로 잡아넣어야 한다"고 대통령을 부추겼다. 그러나 중정의 판단은 한수 위였다. 건드리면 커지는 사건이고 정권 차원의 망신이니 소리없이 묻어두자는 것이었다. 김계원 부장이 끙끙 않으며 보름가량을 지냈을 때였다. (주석 9)
야당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이 6월 1일치(제40호)에 이를 게재하면서 필화사건으로 비화되었다. 6월 2일 새벽 제1야당 중앙당사에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고 중앙정보부와 종로경찰서 소속 30여 명에 의해 갓 인쇄한 <민주전선> 10만 7백부와 옵셋 아연판 4장을 압수하고, 김지하를 비롯하여 <사상계> 사장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민주전선> 출판국장 김용성을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민주전선>은 <오적>시 가운데 군장성 부분 19행을 자체적으로 삭제하고 게재했다. 삭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네째놈이 나온다 장성놈이 나온다
키크기 팔대장성, 제밑에 졸개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온몸에 털이 숭숭, 고리눈, 범아가리, 벌룸코, 탑삭수염,
짐승이 분명쿠나 금은 백동 청동 황동, 비단공단 울긋불긋, 천근만근 훈장으로
온몸을 덮고 감아 시커먼 개다리를 여기차고 저기차고 엉금엉금 기나온다 장성(長猩)놈 재조봐라 쫄병들 줄 쌀가마니 모래가득 채워놓고 쌀은 빼다 팔아먹고 쫄병 먹일 소돼지는 털한개씩 나눠주고 살은 혼자 몽창먹고 엄동설한 막사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 일만하면 땀이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막사지을 재목갖다 제집크게 지어놓고 부속 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까지,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잡자 주어패서 영창에 집어넣고 열중쉬엇 열중열중열중쉬엇 열중 빵빵들 데려다가 제마누라 화냥끼 노리개로 묶어두고 저는 따로 첩을 두어 운우어수(雲雨魚水) 공방전에 병법이 신출귀몰 (주석 10)
박정희 정권이 제1야당 당사를 새벽에 들어가 기관지를 압수하는 폭거를 자행한 배경은 무엇일까. <오적> 시는 이미 공표되었고, <민주전선> 당시 '금기의 영역'이던 군관련 부분을 뺀 채 게재했다. 그런데 <민주전선>은 <오적>시 외에 앞서 소개한 조윤형 의원의 국회 발언과 정부의 치부를 파헤치는 각종 기사를 싣고 있었다.
또 김상현 의원의 발언 요지에는 정여인 사건에 있어서 ①그녀가 장관급 보증의 회수여권을 소지하게 된 과정. ②그녀가 접촉했다는 26명의 고관 명단. ③외화 2천달러 소지 경위. ④오빠 정종욱의 청부살인 진부를 묻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밖에 김응주 의원은 일부 특권층 인사들이 살고 있는 현대판 아방궁 도둑촌 문제 등을 질문했었는데, 그야말로 박정권의 집권 9년 동안의 비정과 부정방탕을 속속들이 파헤친 <민주전선>이 박대통령과 그 권솔에서 치부와 방탕에 여념이 없는 '오적'들을 분노케 했을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민주전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5.16은 도둑촌으로까지 둔갑하고 말았는가'라는 사설, 서울대학생들의 빈민촌 실태조사 보고서, 학생들의 반정부 시국 선언문 등을 싣고 있는데, 이런 기사들이 권력자들을 자극시켰을 것이다. 실체로 이 사건의 공판과정에서 검찰측은 이런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추궁하여 정부의 의도가 시 '오적'보다 다른 목적에 더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주석 11)
뒷날 정가에는 '오적시' 필화사건의 본질은 정여인의 사생아가 박정희나 정일권의 아들이라는 신민당 의원들의 발언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를 직접 문제 삼을 수 없어 <오적>을 빌미로 삼았다는 것이다. 정여인 사건과 관련 청와대에서는 육영수와 박정희의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주석
9>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217쪽, 메디치미디어, 2020.
10> 앞의 책, <오적>
11> 김삼웅, <'민주전선' 수난 12년>, <현대공론>, 1988년 8월호, 254~25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