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어딘가 남과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서른에야 ADHD라는 병을 처음 알았고,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았습니다. 실체를 모르는 병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사람들 각자가 품고 사는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친 후 자신에게 맞는 생활을 찾은 지금, 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손을 흔들어 봅니다. [기자말] |
어느 날 셔츠를 벗는데, 갑자기 머리를 빼기가 싫었다. '셔츠 밖은 위험하다!' 머리에 티셔츠를 걸친 모지리 같은 모습으로 한참 멈춰 있었다. 머리 아픈 세상이 안 보이니 마음이 평화로웠다. 모양은 좀 빠지지만 셔츠 안도 심리적 안전지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의 첫 안전지대는 무덤가였다. 9살 때 자주 가던 동네 언덕. 봉분이 두어 개 있었고 그 앞으로 산자락과 너른 논밭이 내려다보였다. 기가 막힌 풍경도 아니었건만 거기 혼자 앉아있는 게 좋았다. 자연은 서로 싸우지 않았고 나를 판단하지도 않았다. ADHD가 있다는 걸 알고서 그때의 내가 더 잘 이해됐다. 그저 또래와 다른 걸 좋아하는 아이였구나 생각했는데, 자극에 쉽게 지쳐 늘 쉼이 필요했나 보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옥상을 찾아다녔다. 학교 옥상에서 구름멍을 때리며 바람을 맞을 때 제일 행복했다. 나만의 옥상이 필요했다. 우리 집은 4층 건물에 있었는데, 옥상으로 가려면 벽에 붙은 비상사다리를 붙잡고 머리 위 철문을 밀어올려야 했다. 분명 위에서 잠겨 있는데도 그 문을 여는 게 소원이어서 매일 정수리가 납작해질 만큼 머리로 밀어댔다. 지금 대쪽 같은 일자목이 된 데는 그때의 영향이 있을지도.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 때문에 높은 곳이 좋았다. 강의실에서 자동으로 구석을 찾게 되는 것이나 다락방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의 언행에 쉽게 영향 받는 나로서는 물리적으로 독립되어 마음을 회복할 공간이 절실했다. 이 세계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런 곳이 필요하다. 오롯이 자기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존재의 공간.
휴대용 안전지대
요즘 사는 집은 주변에 훌륭한 안전지대가 있다. 언제든 올라갈 수 있는 옥상이 있고, 집 바로 뒤에 아담한 절이, 그리고 웬만해선 사람을 마주치지 않는 좁은 산길이 있다. 하지만 안전지대가 꼭 장소여야 하는 건 아니다. 나를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면 사람이나 행동, 시간일 수도 있다.
명상은 내가 있는 곳을 어디든 안전지대로 만드는 장치다. 에밀리 플레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 15분의 기적>에서 명상의 효과를 고루 밝힌다. 명상은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같은 산성 스트레스 호르몬을 낮춘다. 명상을 시작하자마자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분비되는데, 이렇게 환희를 유발하는 화학물질은 알칼리성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뇌의 신경망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
명상은 ADHD인에게 필수라 해도 좋을 습관이 아닐까. 명상을 하면 직감과 국면 인식을 담당하는 우뇌가 발달한다. 좌뇌와 우뇌가 효율적으로 정보를 주고받게 되어 과거와 미래의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높아진다. 그리고 세부 사항을 넓은 시야에서 한 번에 보며 중요한 것을 감지하게 되어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줄어든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게 해준다니, 거의 내 맞춤형 치료법이다.
집 뒤의 산길에 오를 때 걷기 명상을 자주 한다. 땅에 닿는 발바닥 감각에 집중하면 호흡과 동작이 어우러지기 시작한다. 귀에 들어오는 소리를 찾아본다. 서로 다른 산새소리와 희미한 물소리, 바람이 나뭇잎들을 훑는 소리. 지나쳐가며 눈에 담는 돌과 나뭇잎 색을 최대한 많이 구별해 본다. 여기저기 흔들리는 초록도 서로 같은 초록이 아니고, 땅에 떨어진 잎의 검붉음도 같은 검붉음이 아니다.
몸의 모든 감각을 써본다. 각기 다른 색과 질감은 무슨 맛과 향이 날까. 거칠거칠한 나무 기둥은 씹는 촉감이 바삭하고, 미끈한 돌은 쫄깃하게 씹힐지도 모른다. 혹시 의외의 맛이 나진 않을까. 진홍색 꽃잎에서는 차고 달달한 민트맛이, 옅은 초록에서는 계피향이 난다고 상상해 본다. 좁은 산길이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처럼 다채로운 환희로 가득 찬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서.
햇살이 좋을 때 눈을 감으면 볕의 색깔과 무늬가 보인다. 밝은 빨강이었다가 주황, 오렌지였다가 개나리색에서 병아리색이 되었다가. 색은 번지고 흔들리며 조금씩 변한다. 내 머리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린다. 그렇게 한동안 눈을 감고 있으면 내 형체가 녹아 사라진 듯하다. 세상과 나를 구분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고, 그러므로 어디로도 달아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 속에서 행복감이 차오른다.
감각에 집중하면 지금 이 순간이 알아차려진다. 마음이 조급하거나 찜찜할 때, 이런저런 생각에 휘둘리고 있을 때, 내 주변과 내 몸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달라진다. 세수할 때 물의 온도와 물이 얼굴에 닿는 느낌을 기민하게 느끼는 것. 머리를 빗을 때 라푼젤이 된 마냥 정성스럽게 빗어내는 것.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다른 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새삼 느낀다.
이런 잠깐의 알아차림이 주는 만족감은 힘이 세다. 오늘의 충동구매를 피해가게 하고 경솔한 언행으로 일이 꼬이는 경우를 줄일 수도 있다. 더 건강한 음식을 먹고 싶어지고 잠시라도 몸을 움직여보고 싶어진다.
정원을 되살리는 법
두 번째 상담을 받을 때 명상으로 게임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이 보여주신 컴퓨터 화면에는 생기를 잃고 황폐해진 정원이 있었다. 나는 몸에 작은 패치를 붙이고 심호흡을 하면서 정원이 살아나는 상상을 했다. 들숨...날숨...들숨...날숨... 심장박동이 느리게 유지되자 흑백의 정원에 하나씩 변화가 생겼다. 땅에서 풀들이 푸르게 돋아났다.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었다. 물이 흐르고 나비가 날고 노루가 돌아왔다. 무지개가 떴다.
항상 긴장하고 애써야 상황이 좋아질 줄 알았다. 가슴 졸일수록 가슴으로만 숨이 쉬어져 늘 얕고 가쁜 숨을 쉬었다. 그러다 보니 배 근육이 돌처럼 굳어서, 한동안 지압원에 다닌 후에야 복식호흡을 할 수 있게 됐다.
그 시점에서 명상게임을 하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배신감이 들면서도 상쾌했다. 시뮬레이션이지만, 전전긍긍하지 않고 편안하게 있을수록 상황이 나아진다는 걸 체험한 것이다. 황량했던 정원이 내 내면 같았다. 깊은 숨을 쉬며 살아야했다. 그래야 몸과 마음의 바탕을 가꿀 수 있었다. 물이 흐르고 생명이 사는 땅으로.
들숨은 짧게, 날숨은 천천히 길게 쉬는 게 좋다. 산소를 몸속으로 들여보내는 들숨은 교감신경을 활성화해 몸을 긴장시키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날숨은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해 심신을 이완하기 때문이다. 힘들 때 긴 숨을 뱉어내면 미약하게 소름이 돋는 걸 느낀다. 무엇보다 손쉬운 카타르시스다.
이렇게 심호흡을 하면 모든 순간이 호흡명상에 가까워진다. 언덕이나 계단을 오를 때도 도착만 생각하면 괴롭지만, 깊은 호흡에 맞춰 발을 옮기는 데 집중하면 몸도 덜 힘들고 정신적으로 에너지를 얻는 시간이 된다.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복식호흡을 하면 스스로 교감신경을 안정시킬 수 있다. 몇 주 전 나는 박람회에 갔다가 불안발작을 겪었다. 이틀 내내 사람들과 붙어 있다가 더욱 혼잡하고 시끄러운 곳에 있게 되니 스트레스가 폭발한 것이었다.
행사장을 빠져나가 벤치에 앉았다. 눈을 감고 날숨을 길게 내뱉으면서, 트라우마 치료를 받을 때 상담선생님과 설정한 '안전고요지대'를 상상했다. 스무살 때 패러글라이딩으로 하늘을 날던 때의 기억이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 몸이 느끼는 중력과 부력, 속도감, 흐릿하게 내려다보이는 사람들의 세상. 한동안 눈물이 흐르는 대로 두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쉬니 안정이 찾아왔고 다시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무력감이 찾아오면 두 손을 내려다보곤 한다. 영화 <벌새>에서 주인공 은희가 따르는 영지 선생님이 한 말을 떠올리며.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도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을 때도 숨은 쉴 수 있다. 잠시 눈을 감고 나를 먼 곳으로 보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걷고, 자전거를 타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늘 수고하는 눈과 발을 쓰다듬을 수도 있다. 하루 단 1분이라도 좋을 것이다. 마음 먹는 순간 나는 언제든 안전하고 완전해진다. 비록 돌아가야 하는 현실에선 그렇지 못할지라도, 내가 품은 세계는 나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브런치에는 긴 글로 연재합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adhdworker)
* 글에 나오는 신체감각 훈련, 걷기명상, 호흡명상, 일상생활 속 알아차림 등은 ‘마음챙김 명상’의 훈련법을 이용 또는 응용한 것이다. “마음챙김을 한 가지로 단순하게 정의하면, 대상(예컨대 소리, 냄새, 맛, 정서 또는 신체 경험)에 대해 의도를 갖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마음챙김을 제안하고 대중화한 존 카밧진 (Jon Kabat-Zinn)은 ‘마음챙김은 특정한 방식, 즉 의도적으로 현재 순간에 비판단적인 주의를 기울임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데이비드 에머슨, <트라우마 치유 요가>에서 인용)
*'안전기지'는 존 볼비(John Bowlby)가 주창한 애착이론에서 나온 개념이다. 엄마는 아이의 ‘정서적 안전기지(secure base)’가 된다. 안심하고 세상을 탐색할 수 있게 하고, 자기조절과 자기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이다. 부모 외에도 친구, 연인, 동료 등이 안전기지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전문용어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신에게 안전감을 주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안전지대'라는 말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