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이던 1970년은 김지하의 생애에 가장 극적이고 활력이 넘쳐 그의 군학인생이 두고두고 남을 작품을 쏟아 낸 기록적인 연대였다.
<오적>에 이어 5월에 집필하여 직접 연줄을 맡았던 희곡 <나폴레옹 꼬냑>은 그의 구속으로 연출자 없이 이화여대에서 상연되었다.
이 시기에 희곡 <구리 이순신>을 쓰고, <시인> 6월호와 7월호에 평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했다. 8월에는 <금관의 예수>를 쓰고, 10월에는 원주 <가톨릭 노동청년회 JOC>를 주재한 데 이어 11월에는 동지들과 만든 항일민족학교에서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연말에 처녀시집 <황토>를 간행했다.
김지하는 당시 <오적>을 발표하고 첫 시집 <황토>를 발간한, 1970년에 희곡 <나폴레옹 꼬냑>과 <구리 이순신>, <금관의 예수>를 집필한다. 이 희곡들은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풍자를 서구적 사실주의극의 형식에 담아내고 있다. 부분적으로 거지와 문둥이, 엿장수 등 하층민의 대사에 타령조가 차용되고 문둥이가 오광대 춤을 추는 등 전통연희적 요소가 원용되고 있으나 서구의 무대극 형식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않고 있다. '마당극'이라는 새로운 민족형식을 창안하여 전통연희인 판소리와 탈춤의 틀거리에 현실비판적 내용을 담아낸 작품은 1973년에 발표한 <진오귀굿>이 처음이다. (주석 3)
최초의 시집 <황토>는 <어머님께 바친다>는 헌사와 32수가 실렸다. 초판은 한얼문고에서 발행했다. 표제시 <황톳길>의 전반부이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주석 4)
김지하는 시집 후기에서 말한다.
"이 작은 반도는 원귀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다. 외침, 폭정, 반란, 악질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숱한 인간들의 한에 찬 곡성으로 진동하고 있다. 그 소리의 매체, 그 한의 전달자, 그 역사적 비극의 예리한 의식,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 왔다. 갑신(降神)의 시로." (주석 5)
<풍자냐 자살이냐>는 작자의 문학론이 담긴다. 한 대목을 뽑았다.
민요ㆍ민예의 전통적인 골계를 선택적으로 광범위하게 계승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현대적인 풍자 및 해학과 탁월하게 통일시키는 것은 바로 젊은 시인들의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이다. (중략) 우리 말의 고유한 본질과 구조, 예술적 표현, 특히 풍자에 대한 그 적합성에 따라서 민예와 민요는 풍자와 해학을 그 주된 전통으로 창조하였다. 서정민요, 노동요 등 광범위한 단시들과 서사민요, 판소리의 풍자와 해학은 문학으로서의 탈춤 대사 등과 더불어 현대 풍자시의 보물창고이다. (주석 6)
이 해 11월 4일 민족학교 1회 강연의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는 문학과 시사평론의 내용이었다. 마지막 부문이다.
또 그 무엇보다도 더욱 중요시돼야 할 것은 오늘의 젊은 시인들이 과거 일제에 항거하여 과감하게 싸웠던 저 위대한 시인 이상화ㆍ한용운ㆍ이육사의 그 열렬한 조국애와 그 날카로운 현실의식과 그 피끓는 자유에의 열정에서 자기 자신의 혈통을 발견하는 일이며, "말께나 하는 놈 가막소로 가고요 / 애깨나 나을 년 유곽으로 가고요"와 같은 투박한 민요 속에 흘러넘치는 고통 받는 민중의 그 서러운 한과 역동적인 정서를 곧 자기 자신의 정서로 일치시키는 일이다. 이때에만 비로소 우리의 현대 문학, 우리의 현대시는 참된 민족의 노래, 참된 민중의 노래로 될 것이다. (주석 7)
주석
3> 정지창, 앞의 책,
4> <황토>, 15쪽, 풀 빛, 1984, 재판.
5> 앞의 책, 103쪽.
6> <생명으로 쓰는 시>, 45~46쪽, (발췌) 산하, 1985.
7> 앞의 책, 1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