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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한창인데도 마을 쉼터 조성 사업을 서둘러 시작한 건 반장이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2021년 11월 16일 마을회관 앞 데크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경상남도에 제출할 증거 사진을 촬영했지만, 일주일 동안 추가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남편이 현수막을 제작하고, 마을 주민들을 모아 쉼터를 만든다는 증거 사진을 촬영한 건, 시한폭탄으로 변한 반장을 불발탄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다들 들녘에서 추수하느라 바빠 데크에 아무런 변화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반장은 폭발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반장의 표정만 봐도 이미 마음속에선 몇 번의 핵폭발이 있었다는 걸, 동네 주민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 농사일이 많이 없는 반장에겐 가을걷이가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우 이사가 11월 22일 밤늦게 우리 집을 방문했다.

"이봐, 이장! 나도 요즘 일이 바쁘긴 하지만, 이거 지체했다간 동네에 큰 사달이 나겠어. 반장 눈빛을 보면 가끔 무서울 지경이라고. 쉼터 이거, 사업비 300만 원으로 업자한테 맡기는 건 어떨까?"
"아재. 300만 원 받고 이걸 해줄 업자도 없구요. 이 사업비의 용도도 업자에게 지급하는 건 금지돼 있어요."


"거참, '경남공익형직불제'라는 공익 실천프로그램이 동네에 이렇게 큰 우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이건 뭐 호환·마마·비디오보다 더 무서울 지경이니. 그러면 일단 내일 진주에 가서 자재라도 좀 사 오자고. 위원장, 내일 자네 트럭에다 반장을 싣고 진주에 가서 자재를 좀 사 오라고. 맛있는 것도 좀 먹이고."

남편은 다음날 일이 있었지만, 우 이사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편 역시 반장의 상태를 우려하고 있던 터라 군말 없이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우 이사님. 일단은 제가 스케치업(도면을 그릴 수 있는 3D 모델링 프로그램)으로 쉼터를 한번 그려 보고 자재를 산출할게요. 뭐 시간은 얼마 안 걸릴 거니까, 내일 아침 일찍 반장님이랑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아침 7시, 반장은 마을회관 앞 데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내도 반장은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았다. 마치 집을 떠난 쉼터를 기다리다 죽은 망부석 같았다.

"반장님! 오늘 진주에 쉼터 자재 사러 간다는 얘기 못 들으셨어요?"
"누가? 언제?"


"아, 아직 못 들으셨구나. 오늘 저희 남편이랑 반장님이 진주에 가기로 했다던데요?"
"그래? 그 얘길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언제 출발하는데?"


쉼터 만들기

7시 5분, 남편은 아침도 못 먹고 반장과 함께 진주로 떠났다. 1톤 트럭 조수석에 앉은 반장은 오른손에 남편이 그린 쉼터 도면을 쥐고 있었는데, 생글생글한 웃음이 반장의 얼굴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남편과 반장이 마을회관에 도착한 건 오후 2시를 조금 지나서였다. 남편은 눈이 퀭하고 안색이 창백해져서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남편의 얼굴에 나타난 모습은 밥을 못 먹으면 드러나는 현상이다. 쉼터를 만들 자재를 사고 아마도 반장이 서두르는 바람에 점심도 안 먹고 함양으로 돌아왔을 게 뻔했다.

트럭 적재함에서 자재를 내려 데크 근처에 쌓아 놓고 반장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장에라도 일을 시작하고는 싶은데, 남편이 배가 고파 비실대고 있으니, 속이 다 타들어 가는 모양이었다.

"반장님, 자재 사느라 좀 지쳤으니 일은 내일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파블로프의 개처럼 배가 고프면 자동적으로 화가 나는 남편의 성격상 아주 정중한 표현이었지만, 반장은 남편의 제안을 못 들은 척했다. 남편도 반장의 반응을 못 본 척하며 내게 자재비 영수증을 건넸다. 진주의 건축 자재 도매상에서 사 온 자재는 총 143만 9400원이었다.

"지붕에 올릴 폴리카보네이트도 안 샀는데, 뭐가 이렇게 비싸?"
"건축 자재비가 많이 올랐더라고."

 
 남편과 아재들, 반장이 쉼터 기둥을 세우고 있다
남편과 아재들, 반장이 쉼터 기둥을 세우고 있다 ⓒ 노일영

쉼터 만들기는 다음 날 아침 8시부터 시작됐다. 반장이 제아무리 안달복달해도, 형틀 목수 출신인 명섭이·춘길이 두 아재가 움직이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게 쉼터 만들기였다. 반장은 잠도 못 잤는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목수 출신 두 아재는 처음에는 뭘 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 상태라 담배만 피워댔고, 남편이 집에서 각도절단기와 타정기 같은 공구들을 챙겨 와서야 일이 진행됐다. 남편은 도면 내용을 브리핑하며 작업의 순서부터 대강 설명했다.

임실에 있는 한국목조건축학교에서 목조 주택 만드는 기술과 스케치업 프로그램으로 도면을 그리는 방법을 배운 남편이 줄자로 치수를 재고 나무를 자르면서 쉼터 만들기가 드디어 시작됐다. 누가 정하지도 않았는데,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남편이 팀장이 되고 두 아재는 팀원 역할을 하고, 반장은 잡부가 됐다.

"아이고야, 일영이 남편은 맨날 술만 처묵고 댕기는 줄 알았디만, 저런 거또 할 줄 아네."
"저거 집을 일영이하고 위원장이 맨들었다 아이가."


호사다마
 
 작업 설명 중인 남편
작업 설명 중인 남편 ⓒ 노일영

동네 주민들의 칭찬을 들은 남편은 약간 으스대며 두 아재에게 일을 지시했고, 반장에게는 잔심부름만 시켰다. '아, 저렇게 명령하는 건 선을 좀 많이 넘는 건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편은 세 사람을 아랫사람 대하듯 했지만, 의외로 두 아재와 반장은 남편의 지시를 고분고분 잘 따랐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반장이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 냈다.

"저기, 위원장. 자재도 다 날랐으니, 나도 전동 드릴로 서까래 좀 고정시키면 안 될까? 이래 봬도 내가 손재주가 좋다고."
"반장님, 이건 손재주로 커버할 만한 일이 아니구요. 현장 경험이 있어야 한다구요. 저기 네일건 못이나 좀 갖다주세요."


호사다마라더니 남편이 그린 도면대로 기둥 6개를 세우고, 보를 놓고, 서까래를 거는 와중에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점심을 먹기도 전에 반장의 팔목이 부러진 것이다. 잡일에 진력이 난 반장이 자신도 서까래를 걸겠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의 만류에도 의자에 올라가서 서까래를 걸다가 의자에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서까래 올리기 직전
서까래 올리기 직전 ⓒ 노일영
 
넘어졌다 일어나는 순간 반장은 뼈가 부러진 것을 직감한 듯했다. 반장의 손목은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랐다.

"위원장, 나 병원에 좀 가야 되겠네. 이거 느낌이 안 좋아, 아주 안 좋아."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발만 동동거리고 있는데, 구경 나온 욕쟁이 천산댁이 입을 열었다.

"요 쉼터 요고는 잘 맨들어지겠구먼. 내가 일전에 안 캤나! 뭐를 할라 카믄 손모가지라도 하나 내걸고 해뿌야 지대로 되는 기라꼬."

천산댁의 말에 누구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다들 속으로 놀랄 뿐이었다.

"그래, 형수. 형수 말이 맞소. 내 손모가지 하나를 걸었으니, 쉼터 이거 잘 만들어지겠지, 뭐."

반장은 이웃 마을에서 구경 온 친구의 차에 올라타서 천산댁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인 뒤 병원으로 떠났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남편과 아재 둘은 잠깐 대화를 나누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쉼터를 완성해야 반장의 손목에게 면목이 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서까래를 건 뒤, 남편과 두 아재, 반장은 병원으로 가고 없다
서까래를 건 뒤, 남편과 두 아재, 반장은 병원으로 가고 없다 ⓒ 노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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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함양으로 귀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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