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은 보수적이다. 낯선 음식에는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식자재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던 선사시대. 배가 고프다고 무턱대고 입에 넣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수만 년을 살아온 DNA가 우리의 몸속에 존재한다. 음식에 관한 선입견과 편식은 그 연장에 있는 방어기제일 것이다. 맛과 향 둘 중 하나만 이상해도 뇌는 이미 미간을 찌푸리며 거부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선입견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편식의 시작이다.
오이가 싫습니다
사실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편식이 좀 있다. 오이를 잘 못 먹는다. 부모님이 튼튼하게 낳아준 덕에 음식에 관한 과민반응 같은 건 전혀 없는데도 그렇다. 면역체계는 오이를 받아들이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데, 코와 혀는 아닌가 보다. 오이의 향이 역하게 느껴진다. 맛은 정확히 그 향과 같다.
입에 쓴 것이 몸에 좋다지만, 그래서 오이를 먹어야만 한다면 그냥 맛있는 걸 먹고 수명을 단축시키는 게 낫겠다고 느낄 정도다. 당연히 김밥에 박힌 오이는 빼고 먹는다. 냉면을 먹을 때에도 오이는 바로 건져서 아내에게 준다. 편식에는 당연히 대가가 따르는 법. 오이를 다른 그릇에 떠넘기기 위해서는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다. 아내는 오이를 좋아한다.
그러다 어느 날, 아내가 조금 짠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내 편식 때문에 평생 오이를 반찬으로 먹을 수 없게 되다니. 더군다나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 아닌가. 결국 동반자의 균형 잡힌 식습관을 위해서라도 내 편식을 고쳐야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홈페이지에 '편식하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10가지 조언'이라는 글이 있다.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식단 준비에 아이들을 참여시키세요. 식사 준비과정에서 또는 식료품점에서 어떤 야채와 과일을 준비할 것인지 아이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이들을 위한 요리책을 함께 읽고 아이가 시도할 새로운 요리법을 고르도록 하십시오.
직접 다듬고 요리하는 것이야말로 식재료에 대한 공포를 줄여준다는 뜻이리라. 평생 편식만 해온 30대 아저씨에게 통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니 꽤 많은 요리를 해 왔음에도 오이를 다뤄본 적은 없었다.
비장한 각오로 마트에서 2천 원짜리 오이 한 묶음을 샀다. 메뉴명은 파이황과. 중국식 오이무침이다. 한자로는 박황과(拍黃瓜). 박은 때린다는 뜻이고, 황과는 오이라는 뜻이다. 종합하면 오이를 두들겨 팬다는 의미.
오이를 세로로 반 가른 뒤 반죽 밀대로 때렸다. 너무 세게 때렸을까. 산산조각난 오이가 여기저기 튀었다. 서글픈 최후였다. 이 오이는 자신의 운명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기껏해야 정갈하게 썰린 오이소박이가 되길 바라고 있었을 텐데.
비루하게 죽은 오이는 복수라도 하듯 쓰디쓴 냄새를 뿌려댔다. 냄새가 코를 치고 들어왔다. 방독면이라고 쓰고 싶은 순간. 오이의 영혼마저 살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마늘, 식초, 참기름, 산초기름, 두반장을 한 스푼씩 넣고 버무렸다.
산산이 부서진 채 향신료를 뒤집어 쓴 오이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적당한 산미와 산초의 아린 향이 잘 어우러졌다. 오이의 혐오스러운 향은 잘 피했다. 그러나 아내의 잔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오이가 주재료인데 오이 향이 나지 않잖아!"
고통을 이겨내고 먹은 오이
약간의 섭섭함. 하지만 괜찮다. 오이와 싸워 이겼으니까. 오이가 싫은 사람은 안다. 어떤 형태로든 오이를 입에 밀어 넣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나는 그 고통을 이겨내고 오이를 먹었다. 성취감이 밀려왔다. 뭔가 어른이 된 느낌. 나는 성장했다.
밥을 차리는 입장에서 오이와 싸운 얘기를 장황하게 풀어놓은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편식을 이겨낼수록 '내일은 또 뭘 해 먹지?'라는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타인의 취향에 제한을 두는 것보다 내가 규정한 호오를 깨 보려고 시도하는 편이 가정에게도 자신에게도 더 생산적이다. 도전할수록 먹을 수 있는 채소의 종류가 늘어나고, 그럴수록 가정의 식탁은 더 건강해진다. 한 번쯤은 해 볼 만한 도전인 것이다. 무엇보다 오이는 두 개에 2500원 밖에 안 한다.
사는 게 그렇듯, 싫은 것들도 막상 부딪혀 보면 그럭저럭 해낼 만 한 것들이 많다. 적어도 오이를 다루고 먹어보는 일은 그렇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