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열 우물 파면 굶어죽고 한 우물 파면 먹고 사는 거야." 하지만 나는 '한우물파'보다는 '열우물파'에 가까웠던 것 같다. 모든 걸 동시에 하고 싶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ADHD의 딜레마라는 우스개가 있는데, 매우 공감한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기보다 계속 한눈을 파는 쪽이었다. A 전공을 하면서는 B나 C 전공을 하지 않은 게 아쉬워서 집중이 안 됐다. 전주에 머물기로 하고서 서울에 안 간 걸 후회하고, 기타를 배우면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하고, 한국무용반에 들어가서는 북춤반을 흘끔거리는 식이다.
이름도 두 번 바꿨다. 새 이름으로 산 지 5년이 되자 점차 이전 이름의 장점들이 그리워졌다. 결국 원래대로 이름을 바꾸고, 뒤통수를 긁으며 주변에 알렸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며 웃었다. "이름 갖고 장난 치냐?" 할 말이 없었다. 이놈의 변덕, 이놈의 충동성, 이놈의 욕심.
이도저도 아닌 나여서 한 가지는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 바라는 대로 살아서는 행복할 수 없는 재질이라는 것. 한 길을 쭉 가서 보기 좋게 성과를 쌓아올리는 직선적인 삶은 안 맞는다는 거다. 그래도, 여기저기 헛다리를 짚게 하는 자잘한 욕망 중에 독보적으로 일관된 욕망이 있긴 했다. 바로 '쓰는 데 몰입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물이 안 나오던 열 우물
내 노트북 바탕화면을 보면 2년 반 동안 찔러본 것들이 한눈에 보인다. 블로그 포스팅, 시 번역, 네이밍 공모전, 미디어 크리에이터, 전자책 편집디자인 등. 머니파이프를 여럿 꽂아 디지털 노마드가 되겠다는 포부로 글쓰기와 겸업할 일을 찾아 헤맨 흔적이다.
부업이라고 쉽게 보고 시작한 것 중에 만만한 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업은 확 타올랐다가 흐지부지됐다. 블로그 포스팅의 경우 처음에는 하루 10개씩 글을 올리다 금세 힘이 떨어져서 지금은 블로그를 사진 저장용으로 쓰고 있다. 10개월간 모은 수익은 귀엽게도 과자 한 봉지 값이다.
아쉽진 않다. '글 부스러기' 폴더는 계속 몸집을 불려오고 있으니까. 독립근로자가 된 후로 쓴 글이 담긴 폴더다. 오래 전 들은 시민기자 활동 얘기가 떠올라 오마이뉴스에 글을 보낸 게 본격적인 집필노동의 시작이었다. 신용카드 이벤트에 참여하겠다고 우왕좌왕한 초보 프리랜서의 하루를 담은 글이다.
헙. 진짜 올라갔잖아! 며칠 뒤 기사가 게재됐다는 알림이 왔을 때 나는 다급히 동거인 M에게 알림을 링크했다. M은 화장실에서부터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나왔고 우리는 얼싸안고 빙글빙글 뛰었다. 첫 원고료는 1만 5천 원. 이렇게 글을 써서 생활할 수도 있겠다는 실감이 왔다.
쓰는 게 느린 나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매주 연재를 하게 되면서 주말에 하던 편의점 알바도 용감하게 정리했다. 여러 모로 '여길 그만두다니 미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글쓰기를 최우선순위로 두자 처음으로 열 우물이 한 우물로 모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신명을 따라가기
헛발질이라고 생각했던 경험들이 글을 쓸 때는 하나하나 재료가 된다. 비록 글이 '산만하다'는 평도 듣고(이것은 일부분 홍시에서 홍시 맛이 나는 이치와 비슷하게 느껴져 속상하지 않았다), 아직 생활비보단 용돈에 가까운 수입이지만, 걱정되진 않는다. 필요할 땐 또 잠시 다른 우물을 같이 파면 된다.
물론 시민기자 활동도 흐지부지될 뻔한 적이 있다. 지금도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완성할 수 있을지 마음 졸인다. 그런데 이런 생활로 다가오기까지 긴 과정을 거치고 보니, 슬럼프가 오더라도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지 떠올릴 수 있다.
'쓰고 싶다'가 모두 '쓴다'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생업과 가사 노동에 치이면 사치처럼 느껴지기 쉽고, 앉아있을 체력과 마음을 들여다볼 일말의 정신력도 있어야 한다. 재능의 한계를 확인하는 일이 두려울 수도 있다. 덜 중요한 다른 관심사에 자꾸 밀려날 수도 있다. 쓰고 싶은 마음을 쓰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 축복을 충분히 누리는 게 내 목표다.
사는 게 재미없어질 때 가끔 대학 선배 O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남과 다른 방식으로 기타를 쳤다. 모임 자리에서는 으레 의기양양하게 기타를 둘러메며 순진한 후배들의 기대감을 잔뜩 높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기타의 몸통을 아무렇게나 두들기면서 제 흥에 넘쳐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야유하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왜, 기타 '친' 건데!"
O는 기타를 칠 줄 몰랐다. 하지만 칠 줄 알았다. 기타를 치는 목적은 즐거움을 얻는 것이고, O는 충분한 즐거움을 얻으며 주변까지 즐겁게 하고 있었으니까. 그냥 웃긴 선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그는 본질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뭔가를 마음껏 할 때의 신명과 환희 속에서 우리는 살아있음을 잊는다. '경험'이 목적이 될 때는 그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 된다. 헝가리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런 사람은 외부의 보상이 필요하지 않기에 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고 했고, 이것을 '삶의 흐름에 깊숙이 빠져들 줄 안다'고 표현했다.
사람은 평생 자기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헤맨다. 어릴 적 막연히 품고 있다가 잃어버린 자기다움을 되찾는 방법을. 나는 직관과 무의식이 이끄는 방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몰입이 길어 올리는 흥을 따라가면 언젠가 찾고 싶은 길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제대로, 제멋대로 뭔가를 펼쳐보고 싶은 마음. 지인 중 한 사람은 자신 안에 '불'이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고, 누군가는 '용'이 있다고 했다. 나는 내 속에서 윙윙거리는 걸 '바람'으로 생각한다. 불어야만 바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바람처럼, 계속 움직여야만 하는 걸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불, 바람, 용. 무슨 '캡틴플래닛'인가 싶지만(땅, 불, 바람, 물, 마음의 다섯 가지 힘을 모아 악당을 물리치는 만화가 있었다), 사람의 깊은 곳엔 그보다 강력한 게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민감하고 우울하고 산만하게 잘 살기
직선적인 삶을 살려 하는 사람조차 단순하게 한 길로만 가지는 않는다. 설령 겉보기에 그래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내면에서 겪는 과정까지 단순하리라 생각할 수는 없다. 알면서도 잊기 쉬운데, 모든 삶은 입체적이다. 타인의 경험과 내면에도 수많은 사연이 거미줄처럼 엮여있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자기 삶에 진정으로 몰입하는 출발점이 된다. 각자가 이 복잡한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를 떠안고 보이지 않게 분투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글을 쓰면서 언어가 아닌 '감각'으로 깨달았다. 이 감각을 유지할 때만이 내가 만든 마음의 틀에서 벗어나 삶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사실 아직도 그럴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자동화된 몸의 반응과 뇌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각을 바꾸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사소한 사건과 자극에도 우울과 불안의 가랑비를, 때로는 소나기를 맞는다.
그러나 내가 만난 ADHD인들은 모두 ADHD가 있어서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을 더 갖출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도 그랬다. 나를 파헤쳐보면서 점점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하게 됐다. 머리로 안다고 꼭 삶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안다는 건 중요하다.
"풍부한 감각경험에 깊은 통찰력이 더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균형 잡힌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성숙할 수 있다." 책 <도파민형 인간>의 에필로그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이다.
지금 생각하기에 '열 우물 파기'는 ADHD를 가진 사람의 가장 큰 자산 같다. 경험이든 생각이든 어떤 자리를 파보고 싶어지면 일단 파본다는 것. 쓸모없어 보이는 경험의 조각들이 만나 작은 통찰을 완성해간다. 작은 통찰은 인격의 부분부분을 변화시키고, 그 긴 과정을 통해서 사람은 계속 새로워진다.
실속만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 세상엔 많다. 내키는 대로 두드리고 퉁기는 게 연주가 되듯, 신명을 따라가며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를 듣는 생활. 그렇게, 나 자신을 찾아헤매기보다 안에서 조금씩 꺼내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열 우물 파기의 다채로운 즐거움을 누리면서.
덧붙이는 글 | 이번 화로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브런치 페이지에 번외편과 출간 공지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adhdwo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