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잡지나 이미 수명이 다 한 물건, 잊힌 사람들을 찾아 넋 놓고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궁금하고, 궁금해서 찾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상한 구경기'를 시작합니다.[기자말] |
최근 몇 년 사이 '청량'이라는 단어가 음악을 수식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청량미 넘치는 노래', '청량돌' 같은 식으로 폭넓게 활용되곤 한다. 달려가는 느낌의 비트, 시원하게 올라가는 고음 등 각자가 느끼는 청량함의 조건은 조금씩 다르지만, 유독 여름노래를 꾸며줄 때 자주 쓰이는 단어라는 데엔 많이들 공감할 것이다.
사전에 따르면 '청량하다'는 '맑고 서늘하다', '소리가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다. 문득 과거의 용례가 궁금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청량'을 검색했다. 콜라나 사이다, 환타 등을 '청량음료'라고 부르던 과거가 있었다. 싸하고 짜릿하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은 분명 맑고 서늘하다. 종종 '청량한 녹음(綠陰)'같은 표현도 등장한다. 눈으로도, 촉감으로도 느낄 수 있는 감각. 귀로 느끼는 산뜻함과 시원함이 여름과 청량을 단짝으로 만드는 것 같다.
생각난 김에 청량한 여름음악이나 들어볼까. 유튜브에서 '청량'을 검색하니 '드라이브 당장 갈기고 싶은 K-청량 맛집으로'나 '여름 하이틴 청량 다 때려 박은 노래' 등의 플레이리스트가 눈에 띄었다. 좀 쎈 제목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건, 여름 시즌의 음악방송을 모은 한 시간짜리 영상이었다. '시원청량한 썸머퀸 걸그룹 여름노래 모음'.
매주 새로운 무대를 꾸미는 음악 쇼프로는 시청자의 청각과 시각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 언제나 계절과 절기에 민감하게 반응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음악방송은 여름의 청량한 순간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왔을까? '해변의 여인' 같은 'K-클래식'을 부르는 것 외의 방법으로 여름을 담아낸 과거의 음악방송이 궁금해졌다.
팬데믹 '한참 전'의 여름 특집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310회(1992년 8월 1일)는 지금은 사라진 드림랜드 야외수영장에서 진행됐다. 색색의 미끄럼틀, 수영장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사람들이 모두 무대 장치가 됐다. 레트로한 풍경을 영상으로 감상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팬데믹으로 접어든 최근 몇 년간은 방송에서 보기 어려웠던 풍경이다. 카메라는 튜브의 동그란 틈으로 노래하는 출연자를 클로즈업하거나, 모노레일을 타는 시민들을 촬영했다.
특별 코너로 가수들은 여름노래('Surfin' USA' 등)와 비와 관련된 노래('Singing in the rain' 등)를 메들리로 불렀다. 배경이 수영장이니 여름노래를 부를 땐 딱히 효과가 필요 없었는데, 비 노래를 부르는 김민종, 이덕진, 이상우, 이승연에겐 계속 인공 물보라가 날렸다. 앞뒤 상황을 모르면 벌칙처럼 보인다. 비 오는 날 KBS 1TV <열린음악회> 출연으로 '레전드 수중대첩'이라는 전설의 짤을 남긴 가수 크러쉬가 떠올랐다.
요트경기장에서 워터파크까지
야외 공연이 비 내리는 무대처럼 출연자들에게 악조건이진 않을까. MBC 건물 옥상에서 펼쳐진 <쇼!음악중심>의 소녀시대 '소원을 말해봐' 무대(2009년 7월 18일)를 다시 시청했다.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인데, 높은 곳이 무서운 멤버라면 춤을 출 때 힘들었을 것 같다.
기억에 남을만한 소녀시대의 여름 퍼포먼스가 또 있다. 'Etude' 무대(2009년 8월 15일)를 위해, 멤버들은 워터파크 풀 안에서 맨발로 노래와 춤을 소화했다. 마치 얕은 바닷가에 발을 담근 채 무대를 하는 듯, 청량했다.
물론 무대 뒤에 분수를 두 개나 설치한 MBC <음악캠프>(1999년 6월 26일, 현재 <쇼!음악중심>)의 상반기 결산 특집처럼 야외로 가지 않아도 여름 분위기를 낼 순 있다. 그렇지만 어쩐지 허전하다.
음악 쇼프로그램은 여름의 '정점'을 화면에 담기 위해 청량한 배경을 적극 찾아 나섰다. 한강시민공원 반포지구,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 에버랜드 캐리비안 베이와 장미공원 등이다. 겨울의 스키장과 같은 역할이다.
수영장이 어렵다면, 아이디어로 승부한다
발상의 전환을 한 특집도 있다. MBC <음악캠프>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 8월 22일)와 MBC <인기가요 베스트50>의 '한여름속의 겨울'(1996년 7월 20일) 에피소드다. MC들은 지나가는 여름이 아쉬워 '8월의 크리스마스' 특집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무대 곳곳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이 놓였고, 출연진들은 금방이라도 캐롤을 부를 것 같은 옷을 입었다.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막상 무대를 보면 콘셉트가 귀엽게 느껴진다.
음악 쇼프로그램을 비롯해 수많은 방송의 배경이 된 에버랜드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2021년 4월, 에버랜드에서 '용인 자연농원' 시절의 라디오 공개방송 콘셉트로 방송이 진행됐다는 것.
'MHz.1976 On Air 자연농원'이라는 제목으로, 에버랜드 개장 45주년을 기념하는 방송이었다. 브라운관TV와 오래 전 광고 포스터도 레트로한 분위기를 돋웠다고 한다. 이 공개방송에선 에버랜드에서 촬영된 추억사진을 모은 영상도 상영했다. 쨍한 여름의 순간을 담은 사진도 많이 모이지 않았을까.
그 중 누군가에겐 풀 안에서 'Etude'를 부르던 소녀시대의 모습이 여름날의 청량한 추억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