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에 이장직을 맡겠다고 마음먹은 건, 마을에서 생산되는 밤을 가공하겠다는 내용의 기획서로 우리 마을이 예비마을기업으로 선정됐고, 이를 계기로 마을에 협동조합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을기업 활동은 2021년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마을이 예비마을기업으로 선정되고, 마을에 협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절반 정도는 당시의 박 이장 체제로는 마을의 변화가 힘들지 않을까 판단했다. 하지만 관성이라는 물리법칙이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 터라, 내가 이장이 되기까지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았다.
어쨌든 투표를 통해 이장으로 선출되고 나니, 이장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사실 이장 업무가 많았다기보다 그동안 마을의 해묵은 민원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1년을 결산하는 마을 '대동회'에서 발표하려고 2021년에 시작되고 종결된 사업들을 정리해 보니, 종결 사업은 무려 29개였다. 한 달에 평균 2.4건의 사업을 진행하고 마무리한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 2021년에 종결된 사업 중 가장 많은 건, 총 29건 중 13건으로 배수로·세천 정비였다. 비가 많이 오면 항상 위험해지는 곳부터 민원을 해결하려 했는데, 쉽지 않았다. 위험하지만 계속 방치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에 미친 폭우가 우리 마을을 들쑤시고 지나갔을 때 두 집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한 집은 닭장에 허리까지 물이 차서 닭이 모조리 폐사하고, 보일러실이 물에 잠겨 보일러까지 교체해야 했다. 그 집에 사는 주민은 마을의 욕쟁이 할머니 천산댁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집은 마을에서 '바른 생활맨'으로 소문난 우 이사가 사는 곳이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번지수의 장난인지 극과 극의 두 사람은 허름한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는 이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두 사람이 이웃이라서 욕쟁이 천산댁은 욕을 더 많이 하고, 우 이사는 극단적인 도덕주의자로 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천산댁은 도덕주의자 우 이사를 보면 위선자로 느껴서 만날 때마다 욕을 퍼붓고, 우 이사는 천산댁의 욕설을 들으며 군자의 도를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다 보니 극단적인 도덕주의자가 된 게 아닐까?
상황 분석
아무튼 폭우가 내리면 두 집이 마을에서 제일 위험한 곳으로 변하는 건, 천산댁과 우 이사가 담장을 사이에 둔 이웃인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두 사람은 폭우로 집이 매번 위험에 처해도 서로 의논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천산댁 닭장에서 살던 닭들이 폭우에 폐사를 당하는 걸 보고도, 우 이사는 뒷짐을 지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왈, 서두르지 않아도 신속하고, 움직이지 않아도 도달한다"라는 멘트를 날렸으니, 천산댁 입에서 욕설이 서두르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도 얼마나 신속하게 우 이사의 귀에 도달했겠는가 싶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집이 곤란에 처한 걸 보며 즐기는 것으로 자신의 피해는 잊어버리는 듯했다. 너무 답답해서 말이 통하는 우 이사에게 먼저 물었다.
"아재, 두 분이 서로 얘기가 돼야, 면사무소에다 여기 배수로 공사를 좀 해달라고 말할 수 있다니까요. 천산댁 아줌마가 민원을 넣어 담당자들이 현장 조사 나오면 아재가 공사하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거참, 내가 여기 뒤에 배수로 좀 어떻게 해달라고 면사무소에 얘길 해서, 면사무소 직원들이 조사를 나오면, 천산댁이 직원들에게 쌍욕을 하면서 필요 없으니 꺼지라고 먼저 그랬다니까. 내가 한두 번 민원을 넣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 인간이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순 없다. 늘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올바르게 판단하는 우 이사라도 인간적인 약점은 있는 법. 근데 하필이면 욕쟁이 천산댁과 이웃이라니···. 사는 게 부업이고, 웃는 우 이사 얼굴에 침 뱉는 걸 본업으로 여기는 천산댁이 바로 옆집에 살다니···. 내가 우 이사라도 법보다 주먹이 혹은 욕설이 먼저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천산댁과 관련되면 공자의 논리가 아니라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의 법전을 따르는 우 이사의 편만 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재! 그러지 말고 이번에 천산댁 아줌마랑 의논해서 여기 집 뒤에 배수로 공사 끝내버려요. 비가 많이 올 때마다 불안하고 무섭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그 여자가 먼저 우리집으로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공사를 하자고 하면 내가 한번 생각해 볼 수는 있지."
관계 악화
더 이상 대화를 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느껴졌다.
"아줌마! 닭이 모조리 죽을 정도였으면, 아줌마도 죽을 수 있었어요. 우 이사님이랑 얘기해서 여기 집 뒤에 배수로 공사를 진행하는 걸로 해요."
"내가 그 X팔 쌔끼 디지고 나믄 공사해뿔 기다. 그 쌔끼가 물에 동동 떠내리 가믄서도, 공자왈 맹자왈 그 지랄을 떨 수 있는동 한번 보자꼬."
두 사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였다. 두 사람과 함께 배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면사무소 담당 계장과 얘기를 나눴다.
"어차피 땅 문제 때문에 해결이 안 될 거란 걸 알고, 두 분이 그러시는 걸 겁니다. 두 분 집 뒤의 배수로는 박 회장님 땅이거든요. 박 회장님의 동의를 받은 기공승낙서를 가지고 와야 공사가 진행되는데, 그 땅의 주인인 박 회장님이 자기 땅에 심은 편백나무들까지 뽑아가면서 배수로 확장 공사를 하라고 할까요?"
아! 이 배수로는 천산댁과 우 이사, 두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박 회장의 승낙이 필요했다. 하지만 면사무소 담당자는 박 회장이 배수로를 위해 기공승낙서에 서명하는 걸 거절했다고 말했다.
예전에 천산댁과 우 이사가 함께 박 회장을 만나 배수로 공사를 위해 기공승낙서에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박 회장은 호탕하게 웃기만 하고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면사무소의 담당 계장은 천산댁과 우 이사가 서로 너 때문에 박 회장이 기공승낙서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싸움을 한 뒤,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악화된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상황을 분석했다.
첩첩산중
결국 배수로 문제를 둘러싼 천산댁과 우 이사의 싸움은 '을'과 '을'의 갈등이었다. 예전에는 거의 모든 문제에서 '갑'과 '을'이 맞붙어 싸웠는데, 요즘엔 거의 모든 사회적 싸움에서 '갑'이 사라져 버렸다.
'을'들이 서로 상대방을 '갑'이라고 생각하며 싸우는 갈등들. 도대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이런 싸움들이 많아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박 회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만나러 갔는데, 처음엔 만나지 못했다. 전날 전화로 약속을 했는데도, 갑자기 부산에 일이 생겨서 집에 없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박 회장은 전화를 끊었다.
일주일 뒤, 박 회장을 만났을 때 조금 놀랐다. 그렇게 재산이 많다는데, 폭우에 이웃이 죽을 정도의 상황이란 걸 알면서도 기공승낙서에 도장에 안 찍은 사람치고는 '갑'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회장이라는 사람은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자기가 하는 말에 굉장히 신중하고, 타인의 상황에 대해 공감도 할 줄 아는 젠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젠틀함이 상대방이 누군지에 따라 선별적으로 발휘된다는 걸 곧바로 알게 됐다.
"이장님이 프로골프선수 출신이라는 얘길 많이 들었습니다. 마을을 위해 고생 많이 하신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요, 그 좋은 직업과 기술을 놔두고 여기서 뭐 하려고 이장을 하십니까?"
박 회장은 골프에 관한 얘기를 거의 한 시간가량 이어갔다. 드라이버 비거리가 짧아서 고민이라며 해결책을 묻는 박 회장에게 숨겨둔 비법을 풀었다. 어떻게라도 기공승낙서에 도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저기, 박 회장님. 편백나무를 심은 경계에 사시는 두 분 집이 비만 오면···."
"아, 그 양반들! 저는 괘씸해서 서류에 도장 못 찍습니다."
문제 해결은커녕 첩첩산중에 갇힌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