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을 한 서울시의원을) 마주치면 정말 어떻게, 정말 드잡이라도 하고 싶은데... 초기에 언론에서 약간 왜곡된 보도를 했기 때문에 그 여론을 바탕으로 이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갖고 그런 발언을 했지 않았나 싶어요."
신당역 사건 유가족 측 대표인, 피해자 A씨의 큰아버지가 20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터트린 분통이다.
해당 서울시의원에 대한 법적 대응을 고려 중이라는 유족 대표는, '처음에 왜곡된 보도라면 어떤 (보도이냐)'란 진행자 질문에 "확인되지 않은 (내용, 그러니까), 둘이 사귀다가 영상을 확보하고 얘가 그걸로 협박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보도)"라며 그 보도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같은 역에서 근무할 때 이 친구가 여자 화장실에서 불법촬영을 했는데, 그걸 조카가 최초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취지의 설명이었다.
15일 이후 사건이 알려지면서 실제 비슷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주류 미디어를 중심으로 '보복 살인'이란 제목의 기사들이 양산된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유족들이 가해자에 이어 언론 보도를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나선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20일 오후 유가족을 대리하는 민고은 변호사(법무법인 새서울)가 대독한 유가족 입장문에도 이러한 언론 보도에 대한 피해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었다.
"피고인의 추가 범행으로 피해자분의 의사와 관계 없이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고 초기에는 전혀 다른 사실관계로 보도가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유족분들에 뜻에 따라 사실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저는 언론인터뷰를 계속 했지만, 기사는 저의 의도와 달랐습니다.
유족 분들이 게시를 원하지 않는 기사에 대해 삭제 요청을 하면 내부 절차 상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족들을 위해 작성하는 기사일 텐데 유족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는 삭제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유족들이 수정이나 삭제 요청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언론, 피해자의 피해상황보다 "내부 절차"를 더 중시한 언론. 이런 비난을 받는 것을 넘어, 언론보도가 피해자 및 유족의 명예를 훼손하며 2차 가해를 자행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실제 보도 행태는 어땠을까.
사실 아닌, 선정적 내용 보도... 유가족 측 "얼토당토 않다"
"두 사람이 연인관계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지난 15일 오전 <조선일보>의 신당역 사건 단독 보도 내용 중 일부다. 구태여 '단독'을 붙인 것도, 촬영물 내용 특정 등 범죄 양상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마치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처럼 쓴 선정적인 보도의 극치라고 볼 수 있었다.
유가족들은 즉각 이 보도에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16일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유가족 측은 해당 기사가 보도된 15일 일부 기자들과 만나 "선정적인 보도는 안 했으면 좋겠다. 자제해 달라"며 "마치 '둘이 사귀었고 가해자가 같이 지냈던 영상을 유포한다고 협박했다'는 식의 내용을 조선일보 보도에서 봤는데, 그건 얼토당토 않은 내용"이라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이후 '2차 가해 우려'를 이유로 문제 부분을 삭제했다.
<조선일보>의 초기 단독 보도는 물론이요, 사건이 파장을 일으킨 15일과 16일에도 다수 매체의 선정적이거나 부정확한 보도 또한 문제가 됐다. 15일 YTN, KBS, MBC 등 주류 미디어가 제목으로 뽑은 '보복 살인' 역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왜곡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점에서 문제로 지적됐다(관련 기사 :
신당동 스토킹 살인이 '보복' 사건? 이의 있습니다 http://omn.kr/20q9g ).
이에 대해 영국 출신 라파엘 라시드 프리랜서 기자는 15일 트위터에 "한 여성이 끔찍하게 살해된 사건을 두고, 한국 언론은 '단독' 타이틀을 차지하려 하이에나 마냥 몰려든다", "얼마나 자기가 잘난 기자인지 뽐내고 싶어한다"고 꼬집었다.
사건이 알려진 15일 이후 21일 오전 11시 현재, '신당역 단독'으로 검색되는 기사들은 포털 네이버 기준 수십 건에 달한다. 일간지는 물론이요, 특히 사건사고 취재에 강한 방송사들이 '단독'에 집착하는 경향이 짙었다. 20일 KBS나 17일 YTN의 경우 자사가 취재한 단독 보도들을 3~4차례 포털에 중복 송고하는 등 '클릭 장사'에 혈안이 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단독' 기사는 선정적 보도로 이어지기 쉽다. 단독을 단 기사들 중에선 '완전 범죄' '충격적 범죄' '보복 살해' '몰카' '원한' 등 클릭을 유도할 만한 제목들이 주를 이뤘다. 경찰 수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단독으로 단 기사들도 많았다. 가해자 자택 압수수색 등과 같이 불과 1~2시간 빠른 내용일지라도, 속보 경쟁을 자랑이라도 하듯 어김없이 단독이 달리는 경향은 이번 사건에도 어김없이 적용됐다.
언론의 2차 가해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살해사건 피의자 전주환(31)이 21일 검찰로 송치됐다. 신상정보 공개가 결정됐던 전주환은 이날 오전 7시30분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송되면서 얼굴을 드러냈다. 전주환은 이 자리에서 '진짜 미친 짓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마스크를 하지않은 채 모습을 드러내며 취재진의 카메라를 노려보기도 했다." - 21일 <중앙일보>, <'신당역 스토킹 살인' 전주환 살벌 눈빛 "진짜 미친 짓 했다">
이날 <중앙일보>는 해당 기사에서, 경찰의 신상공개 결정으로 얼굴이 공개된 피의자 전주환의 마스크 안 쓴 얼굴 사진 5개를 연달아 게재했다. 이 역시 제목이나 형식 모두에서, 피의자에 대한 추측을 포함한 '과도한 악마화' 등 선정적 보도의 일환으로 볼 여지도 있다.
경찰의 신상공개 이전, 이처럼 피의자나 범죄에 대한 경찰 수사 내용을 바탕으로 한 추측성 보도나 그 과정에서 피의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보도 역시 관행처럼 계속됐다. 피의자가 사건 발생일에 현금을 인출한 것을 두고 계획범죄 여부를 추측하는 보도가 쏟아진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범죄 보도에 대한 구체적 가이드라인과 실천 요강, 권고안이 있지만 기자들은 모르는 체하는 듯하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언론이 범죄 보도를 할 때 구체적 내용이나 불필요한 피해자 관련 정보, 자극적이며 흥밋거리 위주로 소비하는 비윤리적 보도를 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지적해왔다.
보도 윤리를 저버린 돈벌이 기사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잘못된 보도는 피해자에게 상처를 남기는 2차 가해이자 인권침해라며 언론의 절제된 태도를 촉구했지만 바뀌지 않고 있다. 언론은 말로만 '2차 가해'를 떠들 것이 아니라 책임감 있게 보도해야 한다."
- 9월16일 민주언론시민연합 <클릭 수 노린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선정보도는 2차 가해> 논평 중에서
이 논평이 발표된 이후에도 언론들의 선정적 보도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경찰의 피의자 신상공개로 클릭 장사의 초점이 옮겨 갔을 뿐, 선정적인 보도는 이어지고 있다. 여성 피해자 대상 강력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행태다.
이전과 다른 것은 되레 유가족들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피해자 유가족 측은 대리인을 통해 사실과 다르거나 삭제 요구를 묵살한 보도 행태를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나섰다.
언론 스스로가 2차 가해자를 자처한 이 상황 자체가 한국 주류 언론 전체가 수치스러워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일부 미디어 비평이나 언론 시민단체의 지적으로 끝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피해자 유가족이 직접 삭제나 수정을 요구해도 "내부 절차"라는 핑계를 댔다는 언론들에게 그런 자성을 기대하는 일 자체가 요원한 일이지 않겠는가.
20일 민고은 변호사가 대독한 유가족 입장문을 통해, 이들은 "사건의 본질은 피해자가 피의자에게 2년동안 스토킹 피해를 입었고 결국 살인에 이르렀다는 것"이라며 "그 이외 모든 것은 부차적이다. 본질 아닌 것들에 대해선 취재의 기회가 있더라도 취재 및 보도를 하지 말아주시길 바란다"고 짚었다. 입장문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더이상 고인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인의 명예가 훼손된다면 이는 곧 남아있는 유족분들의 슬픔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과 다른 보도, 취재 경쟁으로 인한 무리한 취재가 이뤄진다면 이에 대해선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 관련 기사: [전문] 신당역 사건 유족 측 "더 이상 고인의 죽음 이용 말아 달라" http://omn.kr/20sf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