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ㆍ검사의 흑역사에 비해 변호사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
일제강점기 김병로ㆍ이인ㆍ허헌 등 민족주의 계열 변호사들은 엄혹한 상황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고,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의 폭정에 맞선 이병린ㆍ이돈명ㆍ강신옥ㆍ한승헌ㆍ조영래ㆍ박원순 등 반독재 민주화 진영의 '인권변호사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변호사 숫자가 많아지면서 별의별 유형의 율사들이 나타나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역시 어느 직종에나 있는 별종들이다.
한승헌은 권세보다 정의로운 일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능력을 인정받고 탄탄한 검사의 길을 떠나 재야 변호사를 택한다.
검사 경력 5년 정도로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모험이었다. 주위에서 걱정해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오죽하면, 검찰의 고위직 한 분은 퇴임 인사를 하러 간 나에게, 변호사 하기 힘들면 다른 생각 말고 자기한테 전화 한 통만 하고 다시 돌아오라고까지 하였을까.
나의 변호사 전신(轉身)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내 나름으로는 의미 있는 결단이었다. 고액의 보수가 묻어오는 큰 사건이나 흔히 말하는 전관예우는 구경도 못했지만, 그러나 나는 자신의 선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주석 1)
군사정권 시기 재야 법조인의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여느 변호사들처럼 기름진 양지를 택하면 돈이 쏟아지지만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의 음지는 그야말로 황량한 벌판이었다.
애환과 보람이 묻힌 직업이다. 인생의 아우성과 곡절을 피부로 실감하는 직업이다. 평온하고 잘 되는 일로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무슨 변이 일어나야 찾아오는 직업이다. 남의 싸움, 남의 궂은 일을 가로맡아 처결하는 일이 얼마나 큰 고뇌를 수반하는가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거짓말이나 술수가 황하처럼 항시 범람하는 지대에서 남을 부축해 주어야 한다. (주석 2)
변호사가 된 그는 이후 40여 년 동안 시국사건을 주로 맡았다.
여기에 적용된 사건과 법규는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간첩사건,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내란예비음모,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이다. 대부분 독재정권이 조작하거나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자 침소봉대한 시국사건이었다.
반대자나 비판적인 지식인들에게 빨갱이라는 너울을 씌우고 어용화된 검찰과 사법부를 통해 반국가사범으로 단죄하는 형식의 재판이다. 이같은 사건 100여 건을 맡아 변론하였다. 하나같이 피고인들은 억울하고 분통하는 시국사건으로 사법절차는 형식일 뿐이고, 이미 유죄로 작정된 사건이어서 재판에서 승소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가 변호한 사건은 대부분 패소했으나 그럼에도 피고인들(과 그 가족)은 다투어 그에게 변론을 맡긴다. 그가 맡았던 100여 건의 사건은 197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의 정치ㆍ인권ㆍ통일운동의 핵심에 속한다.
특히 암울했던 1970년대와 80년대의 군사독재 아래에서는 교수와 교사들이 교단에서 쫓겨나고 언론인들의 붓이 꺾이면서 이른바 해직교수, 해직언론인이 양산되고 많은 학생들이 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혹독한 시절에 반독재운동의 현장에 섰다가 구속된 노동자-농민-학생-지식인들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가 탄생했고, 그들 자신이 권력의 횡포에 의해 변호사 자격을 빼앗기거나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어두웠던 시대를 헤쳐나간 자랑스러운 역사의 이면에는 그만큼 많은 희생이 따랐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70년대, 80년대의 어두운 역사를 밝고 보람찬 역사로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한 법조인의 한 사람이 한승헌 변호사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석 3)
그는 향후 40여 년 동안 100여 건의 시국사건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다. 뒷날 자신이 변론했던 피고인들과 같은 죄목으로 구속되고 변호사 자격조차 박탈되는 고난을 겪는다.
나의 용기나 능력과는 무관하게 다만 정권차원의 시국사건을 맡고 나서는 변호사가 드물었던 탓으로 나마저 변호를 외면하거나 거절할 수가 없었던, 말하자면 '부득이' 때문에 변호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법정에서도 압제자인 집권자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 하면, 나 자신이 피고인석의 인사들로부터 감화ㆍ감염되는 일면도 있었다. (주석 4)
주석
1> <자서전>, 66쪽.
2> 한승헌, <법창에 부는 바람>, 70쪽, 삼민사, 1986.
3> 강만길, <변론사건 실록, 감사합니다>, <한승헌변호사 변론사건 실록(1)>, 19쪽, 범우사, 2006.(이후 <실록> 표기)
4> <정치재판의 현장>, 5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