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변호사를 개업한 1965년은 박정희 정권이 야당과 다수 국민의 대일굴욕회담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단독으로 협정 비준안과 베트남 파병안을 국회에서 변칙으로 통과시키고, 학생 시위가 계속되자 무장군인이 고려대와 연세대에 난입한데 이어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7월 9일 한국문인협회가 주축이 된 문인 82명은 5개항으로 된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조국의 비운과 민족의 불행을 초래하는 이 매국 망국적인 악조약의 완전 파기를 위하여 전체 국민의 단결과 궐기를 호소하며, 역사의 대도와 민족의 정론에 입각하여 민족의 자주 자존과 국가의 영원한 주권과 국익의 옹호를 위해서 투쟁하는 문화전선의 대열에 적극 참여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고,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정면 도전하고 나섰다.
이 날 남정현은 구속되었다. 문인들이 한일협정에 반대하고 나선 날에, 그것도 4개월 전에 발표된 작품 〈분지〉를 뒤늦게서야 문제삼아 구속한 것이다. 남정현이 단편소설 〈분지〉를 발표한 것은 그해 <현대문학> 3월호였다.
그런데 이 작품이 북한노동당의 기관지인 <조국통일> 5월 8일자에 전재되어,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가 북한 선전기관에 의해 전재가 됨으로써 새삼스럽게 문제를 삼았다.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를 받은 남정현은 며칠 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되었다. 남씨에게 적용한 반공법 4조 1항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국외의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ㆍ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이 작품이 어떤 내용이기 때문에 이토록 엄청난 죄명을 씌워야 했는가? 줄거리를 요약해 본다.
홍길동의 비법과 정신을 이어받은 그의 10대손 홍만수는 어머니와 여동생 분이와 함께 8.15 해방을 맞이한다. 어느날 어머니는 밤새 만든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무슨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미군에게 강간을 당하여 정신적 충격을 받고 미군을 저주하면서 미쳐 죽는다.
어머니를 여읜 만수와 분이는 독립투사인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자 가난한 외가에 의탁,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6.25를 만나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진 채 군에 입대한 뒤 몇 년 만에 고된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수 앞에는 걸식과 방황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굶주림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만수는 어느날 우연히 동생 분이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분이는 미군 스피드 상사의 정부 노릇을 하면서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만수는 분이를 붙들고 어머니를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그러나 아무런 능력이 없는 그는 분이 집에 얹혀살면서 미군물품 장사로 연명한다.
스피드 상사는 밤마다 분이를 미국에 있는 본처에 비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폭언으로 못 견디게 학대한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 스피드 상사의 부인 비취가 미국에서 남편을 찾아 왔다. 만수는 한국의 산하를 안내하겠다고 비취 부인을 향미산으로 유인하여 겁탈해 버린다.
이 사건을 알게 된 미국의 펜타곤 당국은 크게 격분하여 미군부인을 강간한 한국인 홍만수를 주살키 위하여 3억 불을 들여 만든 1만 여의 각종 포문과 미사일, 그리고 전 미군 중에서도 가장 정예사단을 투입, 만수가 숨어 있는 항미산을 포위한다.
그러나 10대조 홍길동의 비상과 정신을 이어받은 홍만수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예수의 기적' 밖에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홍길동의 엄청난 기적을 재연하여 그들의 심령을 뿌리째 흔들어 놓겠다면서 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다짐한다. (주석 5)
이같은 내용이 반공법 4조 1항 위반이라는 검찰의 주장이다. 남정현은 검찰에 송치되어 보름 만에 구속적부심에서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리가 없다"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남씨는 석방은 되었으나 사건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서울지검 공안부 김태현 부장검사는 1년 여의 조사 끝에 남씨를 반공법 위반으로 정식기소했다.
한승헌은 소설가 안동림을 통해 이 사건의 변호인이 되었다.
"터무니 없는 용공혐의에 짓눌린 한 작가의 수난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검찰에 변호인 선임계를 냈던 것이다." (주석 6)
이로써 그는 시국사건 변호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재판이 진행되고 증인신문이 있었다. 한승헌은 원로작가 안수길과 문학평론가 이어령 등을 검찰은 특수신분의 관변 인사들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안수길은 "미국의 존 스타린벡은 <분노의 포도>를 써서 나치독일의 반미선전에 크게 이용당했지만 이 작가가 법정에 선 일은 없다"고 하여, 〈분지〉가 북한 잡지에 전재되었다고 해서 작가를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증언하였다. 이어령은 검사의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놀랐는데, 증인은 용공적이라고 보지 않는가?"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았다. 병풍 속의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로 아는 사람은 놀라겠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아는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고 명쾌하게 증언하여 검사의 기를 꺾었다.
한승헌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변론하였다.
매사를 용공으로 착색하는 것이 반공의 길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되며, 반공이란 명분 아래 국민의 기본권이 부당하게 침해당하는 일이 있다면 본말전도의 역설이 될 것이다. 문학의 본질과 기법에 대한 이해가 없이 특수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색맹인 단견으로 작품을 용공시해서는 안된다. '분지'는 반미, 반정부적 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에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이 묘사되었다 하더라도 반국가단체의 주장에 동조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반공법 제4조의 모호한 규정을 확대 적용한다면 국민의 기본적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할 위험이 있다. 한 작가의 '분지(憤志)'를 곡해함은 '분지(焚紙)'의 위험을 초래할 뿐이다. (주석 7)
그해 6월 28일 열린 1심 판결의 주문은 '형의 선고유예'였다. 피고인 측은 항소를 했으나 기각되고, 사법부에 기대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상고를 하지 않았다.
주석
5> 김삼웅, <한국필화사>, 163~164쪽, 동광출판사, 1987.
6> <자서전>, 69쪽.
7> <실록(1)>, 12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