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호 월간 <다리>는 학생운동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이 특집은 〈학생, 학원, 오늘의 모습〉(남재희),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임중빈), 〈한국 학생운동의 반세기〉(정세현), 〈서구 학생운동의 흐름〉(이영일)으로 꾸며져 있다.
월간 <다리>는 당시 국회의원 김상현을 실질적인 경영인으로 하여 발행인 윤재식, 주간 윤형두의 진용으로 그해 9월에 창간되었으나, 창간 3개월 만인 11월 통권 제3호째에 필화를 당하였다.
이 잡지가 출간되어 시판이 된 지 한참 만인 1971년 2월 12일 당국은 김상현, 윤재식, 윤형두 등을 반공법 제4조 1항 위반 혐의로 입건하는 한편, 필자 임중빈도 같은 혐의로 구속하고,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논문과 관련된 관계서류 일체를 압수해 갔다.
이 논문의 어디에서도 '적을 이롭게' 한 부분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도 당국은 필자를 이적행위로 구속 기소하였다. 서울형사지법 유태흥 부장판사가 발부한 임중빈에 대한 구속영장을 살펴보자.
"프랑스의 극좌파 학생운동인 1968년의 파리 '5월 혁명'에 의한 드골 정권의 타도와 미국의 극좌파인 '뉴 레프트' 활동의 타당성을 전제하면서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되 문화혁명을 통한 정치혁명으로의 길만이 학생운동의 정도이며 무엇보다도 능동적 참여를 통한 변혁이 필수의 것으로 요청된다고 논단하여 은연중 우리 정부 타도를 암시, 반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고, 두 윤씨는 이를 알면서도 게재했다.
검찰이 '이적행위'로 몰아간 배경은 야당의원 김상현이 경영하는 <다리>에 타격을 주고, 야당계열 인사들의 발을 묶는데 목적이 있었다.
일부 언론과 식자들은 이 사건에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런 조짐은 여러 면에서 드러났다. 문제의 필자 임중빈 씨는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씨의 전기를 집필 중이었다. <다리>를 발행하던 범우사에서는 김대중 후보의 선거용 간행물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그곳 대표(사장)가 바로 윤형두 씨였다.
게다가 <다리>의 발행인 윤재식 씨는 김대중 후보의 공보비서였다. 뿐만 아니라 그 잡지의 고문이자 자금 지원자이기도 한 김상현 의원은 김대중 후보의 핵심 참모로 알려져 있었다. 마침 그 다음 해에 대통령 선거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대선 경쟁자 측에 대한 탄압이 분명했다." (주석 2)
한승헌은 1971년 5월 14일에 열린 4회 공판 때부터 이들의 변론을 맡았다. 이 사건의 담당 변호인이 갑자기 사임하면서 본인의 표현대로 '구원투수'로 투입된 것이다.
5월 14일 제4회 공판 때는 대법정에서 좀 작은 법정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입추의 여지도 없이 방청객들이 가득 찼다. 제3회 공판 때 윤재식 씨의 변호인인 이상혁 변호사 이외의 변호인들이 모두 사임하거나 불참해버려 이번에도 변호사도 없이 재판을 받겠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는데, 뜻밖에도 한승헌 변호사가 나와주셨다. 바로 이분이 '분지 필화사건', <사상계>의 '오적 필화사건'의 변호인으로 명성이 높던 한승헌 변호사임을 직감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주석 3)
군사독재 시대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 노릇을 충실히 하였지만 그래도 법관 중에는 정의롭고 양심적인 사람도 없지 않았다.
1971년 7월 16일 우여곡절 끝에 서울형사지법에서 1심 선고공판이 개정되었다. 지검 공안부 김종건ㆍ이재명 검사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을 적용하여 임씨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구형했으나, 목요상 판사는 사건 관계자 전원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목 판사는 문제의 논문은 "헌법상 보장된 언론 자유의 테두리 안에서 민주복지사회의 이념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학생운동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자고 주장한 것에 불과, 반공법 제4조 1항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무죄선고의 이유를 밝혔다.
검찰의 항소에 의해 열린 항소심은 1973년 7월 7일 유상호 부장판사에 의해 검찰의 항소를 기각, 1974년 5월 28일에 열린 대법원에서도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여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여 이 사건은 3년이 지나서야 '무죄'로 마무리되었다.
이른바 <다리>지 필화사건은 이 나라의 사법부로서나, 변호인이던 나로서나 오래 간직해둘 만한 의미를 남겼다. 반공법 사건치고는 이례적으로 1심에서 대법원까지 3전 전승, 내리 무죄판결이 났다. 용기 있게 소신 판결을 한 1심 판사는 이런저런 시달림 끝에 결국 옷을 벗었다. 나는 그 사건 덕분에 피고인이었던 윤형두 형과 평생의 벗이 되었다. 그 많은 시국사건 재판에서 무고한 사람을 한 명도 살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하여 "<다리>사건을 보시오"라며, '전패'는 아니라는 '샘플'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주석 4)
주석
2> <자서전>, 102쪽.
3> 윤형두, <친 김대중계 출판탄압에 이례적 '무죄'>, <실록(1)>, 301쪽.
4> <자서전>, 10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