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그 막료들은 민주공화국의 간판 아래 정치 아닌 위압과 술책으로 시종했다. 위압은 계엄령ㆍ위수령ㆍ휴교령ㆍ긴급조치 등으로, 술책은 마키아벨리즘과 매카시즘으로 나타났다.
권력을 연장하거나 정권에 위기가 도래할 때이면 어김없이 위압책을 쓰고, 선거를 앞두거나 국민 여론이 악화되면 갖은 술책을 동원했다. 양날의 칼을 함께 쓸 때도 많았고, 분리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1971년 봄에 제7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1969년 9월 3선개헌을 강행한 박정희는 예상치 못했던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달변에 연부역강한 김대중은 4대국 보장론을 비롯 각종 공약을 제시하면서 치고 올라왔다. 국민들도 장기집권과 권력형 부패에 정권교체를 바라는 여론이 비등했다.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4월 18일, 이날은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공원 유세에 100만 군중이 모여 민심의 동향을 보여주었다. 정부와 공화당은 창경원 등 국립공원과 영화관 무료입장 등 각종 선심책을 썼으나 시민들의 발길을 막지 못했다.
다시 준비된 술책을 꺼냈다. 이번에는 육군보안사령부에서 악역을 맡았다. 중정이나 보안사에는 안보 또는 보안 관련 사건이 쌓여 있었다. 적절한 시점에 한방씩 터뜨린다. 이번에 나온 카드는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사건'이다. 재일교포로 서울대에 유학 중인 서승ㆍ서준식 형제를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어용화된 언론기관이 대서특필하고 정국은 공안 분위기로 바뀐다. 국민은 긴가민가하면서도 평정심을 잃게 된다.
서 씨 형제는 일본 교토에서 출생한 재일교포 청년이었다. 형인 승 씨는 1968년 동경에서 대학을 마치고 모국에 유학 와서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석사과정을 마쳤고, 아우인 준식 씨는 1967년에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역시 서울대 법대에 유학중이었다.
그들에 대한 혐의는 북한의 지령에 의하여 서울대에 지하조직을 만들고 학내 군사교련 반대 및 박정희 대통령 3선 반대투쟁을 배후 조종하고 인민봉기를 선동하여 정부를 타도하려고 획책했다는 요지였다. 또한, 당시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씨의 참모인 김상현 의원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불순한 정치자금을 전달하였다는 혐의도 들어 있었다. 학생들의 반독재ㆍ반박정희 투쟁에 일격을 가하고 김대중 후보에게 용공 음해를 씌움으로써 대통령 선거를 유리하게 만들려는 저의가 분명했다. (주석 5)
아무리 인권변호사라 해도 '간첩사건'을 맡기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다. 해서 사선 변호사 없이 국선으로 재판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승헌은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서승 씨를 접견하려 했으나 당국은 한사코 이를 거부하였다. 서승 씨가 심한 고문으로 얼굴에 화상까지 입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데다 외부 사람과의 접견을 일절 금지시켰기 때문에 의혹은 한층 더 증폭되었다." (주석 6)
변호인의 접견권은 민주사회의 기본인데도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한승헌은 서승 씨가 구속된 지 석 달 만에 피의자를 만날 수 있었다. 변호인 접견실이 아닌 의무실이었다. 그는 온 몸에 붕대가 감겨 실려나왔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취조관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난로 연료 탱크의 기름을 머리에 붓고 불을 붙혀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취조관에게 차라리 죽여달라고 몇 차례 애원했으나 고문이 계속되자 자해를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날조된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 22일에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서승 씨는 사형판결을 받았고 서준식 씨는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서승 씨는 무기징역으로, 준식 씨는 7년형으로 줄었다. 두 사람 모두 상고했으나 1973년 3월 13일 대법원에 의하여 기각된다.
그들 형제는 몇 군데의 감옥을 옮겨 다니며 수감생활을 하는 가운데 소위 '사상 전향(轉向)'의 강요에 불응하였기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들 형제는 끝내 전향을 거부하였다. 형은 무기로 감형되어 19년간의 감방생활 끝에 미전향수 석방 제1호를 기록하며 1990년 2월에 석방되었고, 아우는 형기 7년을 다 마치고도 미전향자라는 이유로 사회안전법에 의하여 10년을 감호소에서 더 보내야 했다. (주석 7)
긴 세월동안 부모의 나라에서 고초를 겪고 일본으로 돌아간 서승ㆍ서준식 형제는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간첩' 사건>이란 글에서 한 변호사에 대해 언급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20여 년 전 아무도 상종하려 하지 않았던 '빨갱이'를 변호해주신 한승헌 선생님도 그 당시 외로운 존재였다. 우리가 기나긴 시련의 세월을 지나 다시 만난 것에서 역사의 커다란 흐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주석 8)
주석
5> <정치재판의 현장>, 120~121쪽.
6> <실록(1)>, 362쪽.
7> <실록(1)>, 363쪽.
8> 앞의 책, 37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