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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해체식에서 "이의 있습니다" 라고 외치는 당시 노무현 의원
19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해체식에서 "이의 있습니다" 라고 외치는 당시 노무현 의원 ⓒ 김종구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 헌법기능을 마비시키고, 정당의 정치활동을 전면봉쇄하는 사실상의 친위쿠데타를 감행했다.
 
박정희는 5ㆍ16쿠데타를 일으킨 지 11년, 3선연임 금지의 헌법을 고친 지 3년, 4ㆍ27대통령선거로 8대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 반 만에 또 다시 쿠데타로 헌정을 짓밟고,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이로부터 79년 10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7년 동안을 1인 군주처럼 군림하면서 전횡을 일삼았다.  
 
박대통령은 이날 저녁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의 비상조치를 감행했다. 박대통령이 발표한 4개항의 비상조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72년 10월 17일 하오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②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헌법 하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③ 비상국무회의는 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한다.
④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한다.
  
박대통령은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 비상조치의 발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열강의 세력균형의 변화와 남북한 간의 사태진전에 따른 평화통일과 남북대화를 추진할 주체가 필요한데, 현행법령과 체제는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오늘날의 상황에 적응할 수 없으며, 대의기구는 파쟁과 정략의 희생이 되어 통일과 남북대화를 뒷받침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비상조치로써 체제개혁을 단행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박정희는 노재현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포고령 제1호로서 ① 각 대학의 휴교조치 ② 정치집회 금지 ③ 언론ㆍ출판ㆍ보도ㆍ방송의 사전검열 등의 조치를 취했다. 
 
계엄당국은 신민당 의원 김상현ㆍ이세규ㆍ최형우ㆍ강근호ㆍ이종남ㆍ조윤형ㆍ김한수ㆍ조연하 등을 구속하고, 이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는 등 공포분위기 속에서 체제정비에 나섰다.
 
유신쿠데타로 제도적으로나마 유지되던 민주주의가 압살되고 민주인사들이 미증유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양심적인 법조인들도 시련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부터 정치시국사건을 변론해 온 한승헌은 유신쿠데타로 국회의원에서 피고인으로 전락한 김상현의 변론을 맡았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국민의 여론이 심해지자 다시 희생양을 찾았다. 유신 전 정계에서 이른바 '야당 3총사'라 불리던 전 국회의원 김상현ㆍ조윤형ㆍ조연하를 표적으로 삼았다. 이들을 파렴치범으로 몰아 구속시켰다.
 
한승헌이 변론을 맡은 김상현은 한 해 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핵심측근으로 활약하면서 박정희 권부로부터 미운 털이 잔뜩 꽂혀 있었다. <월간 다리>의 실질적 사주이기도 하여 그에 대한 권부의 거부감은 도수가 굉장히 높았다. 

그는 내무위원회 야당 측 간사로 있으면서 돈을 얼마간 마련하여 내무위 소속 의원들에게 추석 '떡값' 명목으로 나누어준 일이 있었는데, 검찰은 이를 뇌물 알선으로 몰아 그를 구속 기소했다. 여야 간사가 합의해서 한 일인데도 야당측 간사만 문제삼은 것이다. '정치탄압'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김의원은 나의 변론에 대해서 걱정이 많았다.

"감옥에 있는 사람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렇게 심하게 나가면 변호사 덕분에 징역을 덤으로 살겠구나" 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그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2년도 채 되기 전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74년 12월 9일) (주석 1)

이후 두 사람은 끈끈한 인간관계를 오랫 동안 유지하였다. 앞의 '3총사'가 안양교도소에서 풀려나온 후 환영을 겸한 송년모임에서 뜻을 모은 '으악새' 에도 함께하는 등 우의를 나누었다. 한승헌 유머록에 제법 널리 알려진 내용의 하나도 김상현과 연계된 것이다. 

그는 풀려난 뒤에 나더러 "형님 덕분에 2년 동안 국비장학생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고 악담인지 인사인지 모를 말을 했다.
 
그는 가끔 "한 변호사가 변호를 맡으면 틀림없이 징역가니까 감정 있는 사람 있거든 한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시오" 라고 말해 좌중을 웃기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내가 변호하는 피고인치고 석방 안 되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시오. 내가 변호한 사람치고 석방 안 된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최악의 경우에도 만기 석방으로 다 나왔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변호가 먹혀들지 않은 사법 현실 앞에 어찌 자괴와 회한이 없었겠는가. 
 
그와 나는 피고인과 변호인 사이로 친해졌는데, 나중엔(이른바 김대중내란 음모사건 때) 공동 피고인으로 군법회의에서 같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서울구치소와 육군교도소에서 함께 감옥살이를 하면서 그가 놀라울 정도로 옥중 공부에 열심인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감탄했다. (주석 2)
 
김상현은 유신초기 유신광기 속에서도 자신을 변호해 준 한승헌을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때 한 변호사께서는 나를 위해 헌신적인 변호를 해주셨다. 독재정권과 당당히 맞선 그분의 변론을 들으면서 지금 누가 감옥에 있고 누가 변론을 하고 있는지를 착각할 정도였다. 추상같은 변론을 하면서도 무릎을 치고 탄복할 정도로 해학과 재치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감옥에 있는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렇게 심하게 나가면 변호사 덕분에 징역을 덤으로 더 살겠구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유신정권의 폭거를 준엄하게 비난하고 민주화와 인권문제에 대한 한 변호사의 신념에 찬 변론을 들을수록 나는 고통보다는 오히려 비장한 기쁨을 맛보면서 감옥생활을 할 수 있었고, 민주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감옥에서 키워나갔다. (주석 3)


주석
1> <정치재판의 현장>, 123쪽.
2> <자서전>, 127~128쪽.
3> 김상현,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실록(1)>, 41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한승헌#시대의양심_한승헌평전#한승헌변호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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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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