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는 자유언론을 적대시하는 습성을 공유한다. 비판을 용납하려하지 않는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언론통제였다. <민족일보>를 폐간하고 조용수 사장을 사형시켰다. 이후 각종 필화사건이 계속되고 그중 한승헌이 담당한 사건의 일부는 앞서 소개한 대로이다
'필화사건 전담 변호사'이기도 한 한승헌은 "필화는 있어서 불행한 것도 아니고 없다고 다행한 것도 아니다. 전자가 의당 해야 할 비판과 저항의 살아있음의 증좌일 수도 있고, 반면에 후자는 압제 앞에 항복한 침묵과 굴종의 반사적 현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석 4)는 '역설(?)'을 펴기도 했다.
유신권력은 걸핏하면 비판적인 언론과 지식인들을 국보법과 반공법으로 엮어 입을 막았다. 그들에게 '통일문제'는 가장 영양가 높은 먹잇감이었다. 이승만이 진보당 조봉암을 처형할 때의 수법 그대로였다. 김준희는 프랑스 소르본느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1972년 귀국하여 건국대학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한반도에 있어서 재통일의 문제와 그 기원>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 분야를 열심히 논구해왔다. 남한에서는 그동안 진보적 통일담론을 펴다가 처형되거나 고통을 겪은 사례가 많아서, 학자들은 이 분야에 연구와 발언을 삼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1972년 10월, 월간 <다리> 창간 2주년 기념 강연회가 명동 대성빌딩 강당에서 열렸을 때,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우선 그는 북한에서 나온 각종 간행물과 전단 등을 들고 나와 "여러분은 이런 것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처벌받지만 나는 정부의 허가를 얻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면서 그것들을 들어 보이며 강연을 했다.
그 무렵만 해도 북한(당국)을 '북괴'라고만 부르던(불러야 했던) 시절인데, 김교수는 꼬박꼬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불러서 남다른 학자구나 하는 인상을 주었다. 북한을 일방적으로 매도만 하던 원색 반공시대에 그는 남북한의 통일정책을 등거리에서 고찰한 다음 평화적 통일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주석 5)
먹잇감을 찾던 공안당국이 방치할 리 없었다. 그는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혐의 요지는, ① 연구협회가 발행하는 <통일연구> 창간호에 <삼중쇄국성과 우리 조국의 재통일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북한공산집단을 대한민국과 동등한 합법정부로 보고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② 월간 다리사 주최 강연회에서 <연방제 재통일의 문제점>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는 가운데 한반도 안에 두 개의 정부가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긴장완화와 재통일을 위해서는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상과 같은 남북유엔동시가입론은 북한 공산집단의 선전활동에 동조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범죄라는 것이었다.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한승헌은 항소심에서 변론을 맡았다. 그는 김 교수의 학문적인 연구결과를 왜곡한 1심판결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남북유엔동시가입론'이 결국 북한공산집단의 선전활동에 동조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항소심은 무죄가 아닌 3년간 형집행유예로 그는 풀려났다. 그런데 한승헌이 상고이유서를 준비 중이던 1973년 6월 23일 박대통령이 '6.23외교선언'을 통해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사실상 유엔동시가입을 선언한 셈이다.
"피고인은 대통령보다 앞서 남북 유엔 동시 가입론을 주장한 선구자인데, 상은 못 줄망정 벌을 줄 수가 있는가. 어느 모로 보나 김 교수가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원판결은 뒤집혀야 마땅하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상고이유서를 끝맺었다.
그러나 몇 달 뒤에 나온 대법원 판결은 '상고 기각'이었다. 내가 쓴 장문의 상고이유에 대해서 "논지(論旨)는 독단적 견해에 불과하다"는 단 한마디로 눈을 감았다. 똑같이 '동시가입론'을 폈는데 한 사람은 반국가사범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영단'을 내린 지도자라는 정부의 억지에 사법부조차도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91년 9월, 남한이 북한을 설득하여 마침내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주석 6)
주석
4> 한승헌, <권력과 필화>, 13쪽, 문학동네, 2013.
5> 앞의 책, 47쪽.
6> <자서전>, 12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